까운 시내는 걸어서 다니는 가까운 사람과 얼마 전 점심식사를 함께 나누는데 “오늘 오후에 무안해서 죽을 뻔 한 일이 있었다”며 몹시 속상한 속내를 풀어놓기 시작한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평소에도 생각이 많아 눈을 감고 자나 싶은데 미래를 구상하고 있는가 하면, 추진하는 일들에 대해 더 좋은 아이디어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참 말 그대로 생각이 많은 사람이다. 그런 그가 그날 오전에도 이런 저런 계획들을 머릿속에 그려가며 길을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호통치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뒤돌아보니 아는 어르신이 길을 가다말고 ‘어른을 보고도 아는 척도 안했다’ ‘어떻게 당신이 그럴 수 있느냐’며 된통 혼줄이 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생각에 빠져 길을 걷다보니 미처 알아 뵙지 못했다’ ‘설마 뵙고도 못 뵌 척 했겠냐’ 며 여러 차례 죄송스런 마음을 표하며 사죄했으나 끝내 껄적지근(?)한 마음을 갖게 해놓고 횡~ 하니 갈 길을 가셨다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점심식사 중에도 내내 맘 편해 하지 않는 그에게 ‘그 어르신이 맘속으로만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 보다 차라리 표현해 주셨기 때문에 해명이라도 할 기회가 있었던거다’ 하며 위로했지만 받은 상처가 꽤나 큰 모양이었다.

이 사건을 대하며 아쉬움이 남는다. 아랫사람은 고의였든 아니었든 이유를 불문하고 어르신의 마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면 수 백 번이라도 사죄해야 마땅하다. 연장자인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면 ‘저 사람이 나를 분명히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인사도 없이 그냥 지나간다면 몹시 괘씸하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화를 나눠보고 오해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윗사람으로서 아량을 베풀어 이해하고 헤어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이야 문명의 혜택을 받아 100m 전방까지 훤히 잘도 보이지만 10 여 년 전 나는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낮은 코 때문인지 여하간 안경이 흘러내리는 것도 귀찮고 썩 잘 어울려 보이지도 않았기 때문에 잘 안보임에도 불구하고 안경은 핸드백 속이나 집을 지키는 일이 더 많았다. 이 때문에 나는 한 때 오해를 받은 적이 있다. ‘지난 번 길 가다가 마주쳤을 때 아는 척도 안하고 그냥 지나가서 맘 상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은 코 앞으로 바짝 다가가서야 상대방 얼굴이 보이니 시력이 좋지 않은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는 멀뚱멀뚱 쳐다보다가 갑자기 아는 척 하는 것도 참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 같아 길을 다닐 때는 아예 머리를 숙이고 다녔던 거라고 설명을 하자 ‘아, 그랬구나. 눈이 나쁜 걸 내가 몰랐었네’ 하며 금새 오해는 풀렸다.

아량(雅量)은 너그럽고 속이 깊은 마음씨를 뜻한다. 아주 안 볼 것 아니라면 먼저는 대화를 하고 그리고 넓은 아량으로 ‘오해’ 대신 ‘이해’를 한다면 알고보면 길지도 않은 삶, 서로 더 많이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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