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영태 장편소설 - 무서운 마을




11월25일 오전9시30분 서산경찰서 형사1계는 한참 부산하다. 정태섭 회장 부부 살인사건이 벌어진지 5일째가 됐지만 아직 밝혀진 것이 없다. 거물이 피살된 사건이라서 충남지방경찰청에서 특별 수사지시가 떨어졌다. 이제 형사1계는 특별수사팀으로 바뀌어 더욱 살벌한 긴장감이 감돈다. 사무실 맨 우측 끝자리 책상에 앉아있는 박정호 형사는 애써 컴퓨터를 주시하면서도 힐끔힐끔 사무실 분위기를 둘러본다. 자신을 포함해 7명이 근무하는 사무실내에 3명은 외근을 나가고 4명이 자리에 앉아있다. 박 형사의 뇌리에는 아직도 사건현장의 잔상이 남아있다.
피살자들은 칼에 복부를 찔려 출혈과다로 죽은 듯 보였다. 정태섭 회장은 5군데, 그 아내는 적어도 3군데는 찔렸는데 워낙 피가 많이 흘러서 상흔을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한 박 형사는 더 이상의 망설임도 없이 살인사건이라고 판단했다. 누가 봐도 명백한 살인사건이었다. 그는 곧바로 현장을 지키는 순경들에게 현장보존 지시를 내리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협조요청을 했다. 과학수사팀은 각종 현대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현장에 남겨진 지문과 DNA를 채집하여 이미 분석에 들어간 상태다. 골똘히 사건현장 사진을 내려다보던 박 형사가 옆자리의 이 형사에게 말을 건넨다.
「참 이상하단 말이야. 사건현장이 너무 어질러져 있어. 당시 범인은 치밀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던 것 같아. 범인이 너무 많은 증거를 남겼단 말이지.」
「저도 현장을 보고 좀 생각해봤는데요. 전혀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없어요. 피해자들을 아주 잘 아는 면식범의 소행 아닐까요?」
박 형사보다 두 살 아래인 이 형사는 깍듯하게 선배 대접을 하며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래서 선배님, 그 저택 집안일 해주던 전 씨 아줌마와 최 씨 영감을 불러서 어제 조사했었잖아요. 그런데 그 양반들은 전혀 모르는 것 같던데요.」
「정태섭 회장네 말이야. 외아들이 있다고 했잖아. 통화해봤어?」
「그게 말이죠. 전혀 연락이 안돼요. 서울에서 직장 다닌다고 하던데.」
「계속 연락해보란 말이야. 연락이 안 된다니 좀 많이 수상하긴 한데.」
이때 전화벨이 커다란 소음을 내며 울린다. 박 형사는 잽싸게 전화기를 낚아채듯 집어 든다.
「네. 박정호입니다.」
「여기 국과수인데요. 며칠 전 살인사건 때문에 저희가 내려갔었잖아요.
지문이 여러 개 나왔는데요. 다른 것은 피해자들 거고, 현관문에서 발견된 지문
하나가 범인인 것 같아요.」
「어떤 지문으로 밝혀졌습니까?」
순간 긴장한 박 형사의 눈가에 주름이 짙어진다. 수화기를 바짝 귀에 밀착한다.
「정인주라는 사람인데요. 이쪽에서 신원조회를 해보니까 피해자들 외아들이에요.」
박 형사의 표정이 갑자기 변한다. 오랫동안 풀리지 않던 사건이 한방에 풀릴 때 이런 표정을 곧 잘 짓곤 했다. 약간의 입 꼬리가 올라 간 것으로 봐서 미소 같기도 한데 전혀 웃음 끼가 묻어나질 않는 엉거주춤한 표정. 표현하기 힘든 특유의 표정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박 형사와 이 형사는 서울 방향으로 급히 차를 몰고 있다. 두 사람은 8km가 넘는 서해대교를 반쯤 지나고 있다. 교각을 한 개 두개 지나며 박 형사의 머릿속에는 지나온 세월에 대한 단편적인 기억들이 스쳐간다. 그중에 유난히 오랫동안 머물다가는 기억이 있다. 9년 전 그의 상사였던 이연준과 얽힌 일이다. 자신의 기억으로는 이연준은 상당히 수사 감각이 있는 사람이었다. 오죽했으면 형사 체질이라고 주위에서 회자될 정도로 사건을 해결하는 능력이 탁월했다. 알고 보면 경찰조직처럼 승진이 느린 곳이 없다. 그런데 이연준은 항상 예외였다. 큰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표창도 두 개나 받았으니 빠른 승진이 보장되었던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박 형사의 머리에는 시기심이 가득차기 시작했다. 자신은 죽 쑤고 있는데 이연준이 사건을 먼저 해결할 때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조용히 뒤에서 박수를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박 형사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사행성 오락실 합동 단속 수사를 맡게 되었는데 관내에서 가장 큰 규모 오락실을 운영하다 불법행위로 걸린 정 사장이 박 형사의 고교후배였다. 박 형사는 수사 원칙에 따라 지인이 포함된 사건이기 때문에 수사라인에서 빠졌지만 정 사장은 집요하게 선배를 찾아왔다.
선후배간의 정에 끌리기도 해서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자신보다 계급이 높은 이연준이 단속정보를 수차례 흘렸었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 후 딱 하루를 고민하던 박 형사는 유일무이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익명으로 당시 경찰서장에게 제보했다. 결국 이연준은 누가 일을 꾸민지도 모른 채 한직으로 밀려나고 급기야 옷을 벗게 된 것이다. 바로 그 이연준을 며칠 전에 경찰서에서 만난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박 형사가 시기해야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영세한 신문사에서도 나이 많은 퇴물쯤으로 대우받고 있을 것으로 보여 측은한 마음까지 들었다.

정태섭 회장의 외아들 정인주는 서울대 법학 대학원 과정을 수료중인 수재다. 정인주와 연락 두절 후 수상히 여긴 이 형사가 탐문수사를 진행해 알게 된 사실들이다. 애인은 있는 모양인데 아직 결혼 약속은 잡지 못했다고 들었다.
정 회장의 아들 욕심은 대단했다고 한다. 늦게 낳은 자식이다 보니 기대감은 더욱 커서 수백만원짜리 개인과외 선생을 매일 붙여줬다고 한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사교육 투자는 초등학교에서도 계속 됐고 중학교 들어갈 때는 전교 수석으로 입학했다고 하니 결국 돈이 수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아버지의 전독적인 투자 덕분에 대한민국에서 최고 인재들이 모인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도 오로지 정 회장의 막무가내 선택이었다. 아들 하나는 누가 뭐래도 법조인으로 키우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머리가 커버린 아들을 부모가 이기지는 못하는 법인가. 정 회장은 아들이 사법고시에 턱하고 붙길 원했지만 아들은 학자가 되길 더 원했다. 그래서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대학원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서산을 출발한지 두 시간이 조금 못돼 강남 신사동 현대아파트에 도착한다. 요즘은 내비게이션이 길을 알려주니 헤매지 않고 곧바로 목적지를 찾는다. 문명이 발전하다보니 현장 출동하는 형사들도 혜택을 보고 있는 것이다. 반면 범죄를 저지르는 범인들도 문명의 혜택을 보기는 마찬가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정인주가 거주하는 8층 현관문 벨을 누른다. 아무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다시 한 번 길게 벨을 눌러보지만 여전히 인기척이 없다. 잠시 후 이 형사가 주차장을 열심히 돌아다닌다. 정인주 소유의 그랜저 승용차를 찾고 있는 것이다.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간 이형사가 1분 뒤 전화를 걸어본다.
「정인주 차를 발견했어요. 집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니까 선배는
현관문을 지키고 계세요. 관리사무소에 가서 상황을 파악하고 올라갈게요.」
정인주의 애마가 발견된 이상 집안에 있는 게 분명하다. 이제 독안에든 생쥐다.

긴장된 순간에도 박 형사는 12년 전에 목격했던 사건현장이 다시 떠오른다. 그 사건의 범인은 대학교수 아들이었다. 부모가 생전에 재산을 물려주지 않자 칼로 찔러 죽이고 마치 강도가 든 것처럼 현장을 조작했다. 그 때는 상사였던 이연준과 함께 한 팀을 이뤄 사건을 담당했었다. 그 사건은 쉽게 풀리지 않고 한 달이 지나고 있었다. 워낙 철저하게 사건현장을 조작했던 탓에 팀원들 모두 강도의 소행으로 판단하고 전과자들을 중심으로 탐문수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전혀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아 자칫 장기 미결사건으로 남을 공산이 컸다. 아마도 이연준의 탁월한 수사 감각이 없었다면 그렇게 됐을 것이다. 그는 사건 수사에 진전이 없자 현장증거를 전혀 무시하고 피해자들의 주위를 내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대학교수라는 아들의 알리바이에 오류가 있다는 점을 발견한다. 피해자의 아들은 사건 당일 서울에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집요한 수사 끝에 서해안 고속도로를 통행했음이 밝혀졌다. 사건 현장에서 서울로 이어지는 전 구간의 단속카메라와 CCTV를 분석해본 결과 진실이 드러난 것이다. 이 어려운 사건 해결로 이연준은 특진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박 형사는 아마도 그때부터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이연준을 시기했던 것 같다. 잠시 후 관리실에 갔던 이 형사에게서 전화가 온다.
「CCTV확인결과 정인주가 어젯밤부터 집안에서 꼼짝 않고 있는 것이 확인됐습니다.」
「빨리 가까운 열쇠업자 불러!」
30분 만에 도착한 열쇠공이 정인주 집의 현관문을 따기 시작한다.
「윙윙-」드릴 돌아가는 소음이 층계를 타고 메아리친다. 드디어 현관문이 활짝 열린다. 대낮의 햇살이 집안 가득히 들어오고 있다. 안방 문이 비스듬히 열려있다. 박 형사가 조심스럽게 열어젖히자 한 남자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침대에 반듯이 누워있다. 정인주가 분명하다. 그런데 오른쪽 손목이 붉게 물들어 있다. 피가 흐르고 흘러 방바닥에 흥건히 고여 있다. 숨을 거둔지 오랜 시간이 흘러 보인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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