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영태 장편소설- 무서운 마을



12월5일 오전9시20분 <주간충남>편집실에서 기사를 검토하고 있던 김재진에게 사무국장 진현미가 다가와서 어떤 분이 찾아왔다고 알려준다. 상담실에는 20대 후반의 여성이 혼자 앉아있다. 시골도시에서는 흔하지 않은 미모를 지닌 여성으로 어느 누가 봐도 호감이 갈 만한 인상이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저는 서인애라고 합니다. 정 회장님 사건과 관련해서 제보 좀 드리려고 왔어요.」
서인애의 말에 김재진은 순간적으로 흥미가 당긴다. 그러면서도 짐짓 태연한 채 묻는다.
「그럼 서인애 씨는 이 사건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정 회장님 외아들 정인주 씨아시죠? 제가 그 사람의 애인입니다.
사실은 인주 씨가 자살하기 전날 밤에 저한테 전화가 왔었어요.」
「정인주 씨가 어떤 말을 하던가요?」
「울먹이고 있었어요. 저는 너무 당황해서 이야기만 들어줬죠.
인주씨말에 의하면 아버지 저택 지하에 악마가 살고 있다고 말했어요. 그 악마가 자기 를 지배하고 있어서 놔주지를 않는다며 간신히 말을 이어갔어요.」
서인애는 상당한 미모와는 다르게 진지하고 당차게 이야기를 이어간다. 김재진은 중요한 제보임을 직감하고 안주머니에서 녹음기를 꺼낸다.
「녹음 좀 해도 되겠죠? 말을 계속 해주세요.」
「인주씨 말에 의하면 그 악마는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세뇌해서 조종했고 얼마 전에는 자기까지 세뇌를 시켜서 뇌를 지배하고 있는데 도저히 무서워서 저항할 수 없다는 거예요.
결국 인주 씨는 악마의 명령을 받아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 말았다는 거예요. 그 악마에게서 해방되는 길은 죽음 밖에 없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말을 마친 서인애는 긴장되었던지 앞에 있는 음료수를 살짝 들이켜고 다시 내려놓는다.
「그런 말을 경찰에도 해보셨나요?」
「예. 담당형사라는 분한테 다 말했는데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면서 귀찮은 표정이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 신문사에라도 제보하고 싶어서 왔어요.」

정태섭 회장 가족의 비극적인 사건은 이미 경찰서장의 수사 발표와 동시에 사실상 종결됐다. 서인애가 정인주와 통화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경찰에서는 미친 사람의 넋두리 정도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머뭇거리던 서인애는 또 다시 말을 잇는다.
「사실 한달 전에 인주 씨와 같이 인주 씨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었거든요.
그런데 그 집 분위기가 상당히 이상했어요. 마침 주말이어서 그 집에서 하룻밤 자게 되었는데 밤 12시쯤 잠도 안 오고해서 넓은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거든요.
정원수를 감상하면서 저택을 한 바퀴 돌아가는데 사람소리가 들리더라구요. 그래서 살짝 내다보니 어두운데서 한 사람은 서있고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는 거예요. 너무 이상해 서 정원수 뒤에 숨어 조금 다가갔죠. 서서 야단을 치는 사람은 그 집에서 정원 가꾸는 일 을 하신다는 할아버지였어요.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건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고 있는 사 람들은 정인주 씨 아버님과 어머님이었어요.
저는 지금도 그 일을 이해할 수 없어요. 제 생각에는 그 때 일과 이번 사건에 분명히 연관이 있는 것 같아요.」
서인애의 말을 녹음하던 김재진이 듣기에도 황당한 일이다. 서인애가 본 것이 맞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일까. 도대체 그 영감이 누구 길래 정태섭 회장 부부를 무릎 꿀린단 말인가. 김재진의 머리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그런 이상한 장면을 목격한 서인애는 밤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정태섭 회장이 어떤 사람인가 국회의원만 두 번을 했으며 이 지역에서는 엄청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람 아닌가.
그런데도 정태섭 회장이 한낱 자신의 집 정원을 가꾸는 노인네에게 무릎을 꿇고 잘못을 빌고 있었다. 이대로 모른 척 넘어 갈 수는 없는 상황 아닌가.

정인주와 서인애는 대학 3학년 때부터 사귀기 시작해서 지금도 같은 대학원에 다니고 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부장판사까지 지내고 서울에서 변호사를 개업한 법조인으로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의 교제는 누가 봐도 어울리는 것으로 양가 부모의 축복을 받으며 자연스럽게 부모님 집을 방문하는 사이가 되었다. 서인애가 정 회장 저택을 드나든 것도 1년이 다 되어갈 정도로 친숙해졌다. 서인애에게는 이제 남의 일이 아닌 것이다. 조금 있으면 결혼식을 올리고 이 집에 들어와서 살아가야 할 며느리가 될 몸으로 말도 안 되는 장면을 모른 채하기엔 너무 많이 와버린 것이다.

그 황당한 장면을 목격한 후 이른 아침까지 고민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한 서인애는 정인주의 방문을 노크해서 그를 깨웠다. 그녀는 정인주에게 어젯밤에 목격한 것을 다 이야기 했다. 그 장면 하나하나를 머릿속에 떠올려가며 세세히 말했다. 서인애의 말을 듣고 있던 정인주는 점점 심각한 얼굴이 되어 갔다. 서인애에게 제대로 본 것이 맞느냐고 묻고 또 물었다. 그렇게 위엄 있고 당당하던 부모가 일개 촌 영감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는 이야기는 정인주를 격분하게 만들었다. 아들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정인주의 아버지인 정태섭은 아들에게도 엄격한 사람이었다. 수백만원짜리 과외선생을 유치원 때부터 붙여주면서도 아들에게 칭찬에는 인색했다. 자신의 뒤를 이어 더 훌륭하고 더 높은 권력자가 되기를 원하셨던 아버지는 그에게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았다. 정인주는 엄격한 아버지 때문에 공부는 잘 할 수 있었지만 아버지의 인생은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대학 3학년 시절 그는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저항했다. 그래서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학자가 되는 길을 택했다. 그 당시 그의 아버지는 대단히 실망했었다. 그러나 다 큰 아들의 결정을 아버지가 꺾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인주에게는 엄격함을 유지하는 아버지였다.

한 달 전 기억을 회상하던 서인애는 목이 말랐는지 탁자에 놓인 음료수를 또 한 번 마시고 다시 내려놓는다. 녹음을 하며 한참 이야기를 듣고 있던 김재진도 한 박자 쉬어가는 느낌으로 그녀를 지긋이 바라본다. 음료수를 넘기는 그녀의 가느다란 목이 마치 사슴의 목을 닮은 것 같다. 섬세한 그 움직임이 느껴진다.
「내 이야기를 들은 인주 씨는 무척 격분했어요. 자신의 부모를 모욕한 그 영감을 찾아가 따져야겠다고 나가더라구요. 제가 말릴 틈도 없이 말이에요. 저는 그 때처럼 인주 씨가 화난 적은 본 적 없어요.」

정인주는 이른 아침부터 격분한 마음을 품에 안고 100여 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최현범네 전원주택으로 찾아가 현관 벨을 울렸다. 차마 그의 부모에게는 그 치욕적인 장면에 대해 물어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자존심이 강한 분들에게 자칫 잘못 물어봤다가 마음의 상처만 커질 것으로 생각했다. 벨을 세 번째 울렸을 때 현관문을 열고 최현범이 고개를 내밀었다.
「너 인주 아니냐? 아침부터 무슨 일이냐?」
「최 영감님, 왜 우리 부모님이 당신한테 무릎을 꿇은 거죠?
당신이 뭔데 우리 부모님을 욕보이시냐구요?」
「아니 이놈이? 아침부터 뭔 지랄이여?
그건 너희 부모한테 가서 물어보면 알거 아니여.」
뻔뻔한 최현범의 태도에 정인주는 정색한다. 어떻게 이런 시골 노인네가 지역 유지 중 유지인 그의 부모를 욕보인단 말인가. 도대체 어떤 약점을 잡혔기에 치욕을 당해야만 하는가. 정인주는 다짜고짜 현관문을 박차고 들어갔다. 그는 어정쩡하게 서 있는 최현범의 멱살을 쥐어 잡았다.
「빨리 바른대로 대란 말이에요. 당신이 뭔데 우리 부모를 욕보이는지 이유를 말하란 말이 에요.」
「내가 누구냐고?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놈.
내 정체를 알고 싶어? 너도 조금 있으면 알 수 있을 거야.
곧 살려달라고 애원하게 될 거야. 내가 너를 지배하게 될 거야.」
정인주는 순간 최현범의 눈 속에서 사악한 무엇인가를 느끼게 됐다. 등골이 오싹해지는 전율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전달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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