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영태 장편소설- 무서운 마을




12월5일 낮12시가 조금 안됐다. <주간충남> 상담실에서 서인애의 제보를 녹음하며 정태섭 가족 사건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던 김재진은 점심시간이 다가오자 서인애에게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한다. 처음 만난 제보자와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색한 상황이기는 했지만 서인애에게 호감을 느낀 김재진의 마음에서 나오는 제안이다.이에 서인애는 약 2초정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다가 말을 건넨다.
「오늘 점심을 제가 대접하게 허락하시면 그렇게 하죠.」

두 사람은 승용차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와 10분쯤 달리면 찾을 수 있는 한적한 레스토랑으로 들어간다. 물론 이곳은 김재진이 귀한 손님을 모시고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때 가끔 찾는 곳이다. 창 밖에는 작은 연못이 아담하게 내려다보이는데 여러 가지 수생식물들이 파란 잎과 줄기를 뽐내며 서로 봐달라고 조르는 것 같아 보고만 있어도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개량한복을 곱게 입은 40대의 깔끔한 여성이 메뉴판을 펼쳐 놓는다. 두 사람 다 점심정식으로 통일해서 주문한다.

김재진이 먼저 말을 건넨다.
「서울에서 내려오셨다면서 승용차로 오셨나요?」
「아니요. 강남터미널에서 서산으로 내려오는 첫 버스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미리 예약해뒀다가 내려오게 된 거에요.」
「갑자기 애인이 슬픈 일을 당하게 돼서 마음이 안 좋으실 텐데요.」
「사람 인생이 참 모르는 것 같아요. 언제 하늘나라로 떠날지 모르니까요.
저희 두 사람은 내년 봄에는 결혼하기로 약속했어요. 인주 씨가 너무 착하고 좋은 사람이 라서 평생 동안 저를 위해서 살 사람으로 생각했어요. 남자로서의 큰 욕심은 없는 소심한 사람이었지만 저만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이었거든요.」
그 사람과의 추억이 생각나서일까. 이야기를 하던 서인애의 뺨에 눈물이 흘러내린다. 여자의 눈물은 남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잔잔한 파도와 같다. 백사장에 단단히 쌓은 모래성을 잔잔한 파도가 한 번 지나가면 허물어버린다. 지금 서인애의 눈물은 김재진이 마음에 쌓은 모래성을 잔잔한 파도가 되어 허물고 있다.
김재진은 잠깐 동안 눈물을 흘리는 서인애를 바라보며 자신의 손으로 그 눈물을 닦아주고
가볍게 안아주고 싶은 강한 충동에 휩싸인다.
그러나 너무 성급한 행동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충동대로 모든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서인애는 자신의 작은 핸드백에서 꽃무늬가 예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는다.
「이렇게 추한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평생을 같이하기로 약속한 사람이 갑작스럽게 죽었다고 하니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주위의 모든 사람이 나를 속이는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도 있어요. 그 사람을 보내줘 야 하는데 제 마음이 허락되지 않는 거죠.」

애인을 잃은 슬픔에 빠져있는 서인애를 마주보면서 김재진도 5년 전에 겪었던 상처가 다시 영화처럼 지나간다.
7년 전 <주간충남>대표가 사실상 부도를 내자 편집장으로 있던 김재진이 억지로 떠맡은 이후 모진 고생을 겪기 시작했다. 그를 포함해서 최소한의 편집인원 4명이 마지막까지 남아 필사적으로 신문을 만들어냈다. 김재진이 아버지에게 빌린 2천만 원은 3개월 만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원룸 보증금 1천만 원까지 빼내서 밀린 인쇄비를 치러야 신문이 나올 수 있다. 김재진은 이제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한계지점까지 몰린 것이다. 이때 구원의 손길이 김재진에게 다가왔다. 3년간 같이 일해 왔던 편집기자 윤하은이 시집갈 때 쓰려고 적금 든 것이라며 5천만 원이 찍힌 통장을 건네줬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김재진을 믿고 빌려준 것이다. 사실 편집기자 윤하은은 김재진이 입사한 3년 전부터 그를 짝사랑하기 시작해왔다. 그의 잘생긴 얼굴도 좋았지만 일에 몰두하는 성실함과 여성을 배려하는 따뜻한 매너에 천천히 빠져들었다. 입사할 당시 김재진의 나이는 31세로 지금에 비해서 몸매도 균형 잡히고 샤프한 턱 선에 대도시에서 익힌 세련된 감각 때문에 아가씨들에게 인기 좀 있을 때였다. 그런데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어 신문 만들기에 몰두하는 김재진에게 윤하은은 마음을 보여 줄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래서 3년간이나 마음을 숨긴 채 짝사랑을 해왔다. 김재진은 윤하은의 느닷없는 배려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녀의 배려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윤하은은 집요하게 김재진에게 자신의 배려를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했다.
결국 김재진은 윤하은의 제안을 뿌리치지 못하고 받아들였다. 그 후 <주간충남>은 위기를 무사히 견뎌내고 점점 안정되어 갔다. 이와 함께 윤하은의 마음을 알게 된 김재진은 그녀와 뒤 늦은 교제를 나누게 됐다. 그렇게 두 사람만의 추억을 만들면서 사랑의 감정은 쌓여갔다. 처음에는 윤하은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시작했지만 마음씨 착한 그녀의 마음에 녹아버린 김재진도 사랑의 포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지하게 사귄지 2년이 지난 어느 날 어둠이 들이 닥쳤다. 아침에 출근하던 윤하은이 4차선 도로에서 횡단보도로 진입하는 순간 내리막길에서 속도를 줄이지 못한 덤프트럭이 덮친 것이다. 한순간에 두 사람의 사랑은 날아가 버렸다. 미래를 약속하며 좋은 가정을 꾸려보자는 말들은 다 허공으로 사라졌다. 그 때 김재진은 사랑하는 사람을 먼저 떠나보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이별을 겪고 난 후 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김재진은 아직도 혼자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있는 서인애에게 김재진은 자신이 겪은 애절한 사랑이야기를 들려준다. 김재진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주의 깊게 전해들은 서인애가 말한다.
「편집장님도 저와 똑같은 고통을 겪으셨네요. 저에게만 하늘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주신 것으로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별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어서 큰 위 로가 됐어요.」
「지금 서인애 씨의 마음에 하늘이 무너진 것처럼 세상천지가 다 절망으로 가득 차 보일 거예요. 그렇지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희망도 함께 있음을 발견할거예요.
하늘나라에 먼저 간 정인주 씨도 서인애 씨가 빨리 희망을 찾기를 바라고 있을 거예요.」

사람이란 같은 고통을 겪다보면 동지의식이 생기는 것 같다. 두 사람은 사랑하는 애인을 잃은 슬픔을 가슴으로 나누다보니 어느 순간인지 모르게 호감이라는 작은 새싹이 돋아나는 것을 느낀다. 식사를 하는 동안 잔잔한 클래식을 들으며 감상에 빠지던 서인애가 말을 건넨다.
「저어.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는데요. 혼자 가기는 겁나기도 해서 편집장님이 같이 동행 해 주시면 고맙겠는데요.」

서인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된 김재진은 차를 몰아 정태섭 회장 저택에 도착한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그녀 혼자 보낸다는 것은 김재진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 되었다. 이미 그녀는 그의 마음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정 회장 저택의 육중한 철문은 굳게 잠겨있다. 김재진이 팔 힘으로 밀어보았지만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잠시 생각하던 서인애가 집안을 살펴보던 김재진에 말을 건넨다.
「이 집 정원일 하던 최 영감님을 만나봐야겠어요.
인주 씨가 자살한 이유를 알고 있을 것 같아요. 한 달 전 그 일이 있은 후로 인주 씨의 행동이 이상해졌어요. 집안에만 숨어 있으려고 하고 나를 만나지도 않으려고 했어요. 분 명히 최 영감님과 다툰 후로 그런 변화가 일어난 거예요.」

한편, 최현범은 비밀의 방에서 정문을 비추는 모니터를 통해 두 사람의 모습과 대화를 지켜보고 있다.
「서인애가 왔네. 내가 너를 찾아가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찾아오다니 이거 뜻밖인걸.」
최현범은 모니터를 통해 서인애와 한 남자가 자신의 전원주택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본다. 그는 지하통로를 지나 전원주택으로 향한다.

김재진이 현관 벨을 길게 누른다. 두 번째 벨을 눌렀을 때 문이 열리며 최현범이 얼굴을 내민다.
「난 또 누구라고 저번에 봤던 아가씨네?」
「네. 영감님 저에요. 영감님은 인주 씨가 왜 죽었는지 아시죠?
인주 씨와 영감님이 다투는 걸 봤어요. 그게 이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 거예요? 말씀 좀 해주세요.」
「아가씨. 난 잘 모르는 일이야. 시골 노인이 뭘 알겠어?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가!
그건 그렇고. 내가 아가씨를 또 볼일이 있을 거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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