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영태 장편소설 <무서운 마을>



12월13일 오후2시 점심시간이 끝난 나른한 오후 김재진이 입원실 침대에 누워 화창한 12월의 하늘을 감상하고 있다. 이렇게 날씨가 좋은 날 다리만 괜찮으면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인사를 드리기도 하고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도 나눌 법도 한데 생각에 머물 수밖에 없다. 이번 주 들어서는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중압감이 더욱 커진다. 당장 인쇄소에서 남은 미수금을 다 갚지 못하면 신문인쇄를 중단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았다. 사무용품이며 식대며 발송비등 외상거래를 허용하던 업체에서 한꺼번에 독촉이 쏟아졌다. 누가 일부러 교묘하게<주간충남>이 망한다는 괴소문을 흘린다는 말도 있는데 거기에 영향을 받은 느낌이다. 갑자기 사방에서 목을 조르는 답답함이 가슴으로 파고든다.

잠시 후 병실 문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사무국장 진현미가 꽃을 한 다발 들고 들어온다.
「사무국장님, 이곳까지 다 오시고. 웬일이세요?」
「편집장님이 걱정되어 왔어요. 건강도 문제지만 요즘 신문사 사정이 말이 아니잖아요.」
「어떻게 방법을 찾고 있는데 그게 잘 안 되네요.」
진현미는 날씨 이야기를 시작해서 여러 가지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수다스러운 아줌마의 말처럼 이것저것 자연스럽게 화제가 이어진다. 그렇게 조금 지난 후에 다시 운영문제로 화제가 돌아온다.
「편집장님, 저희들이 나름대로 신문사를 살려 보기위해 대책을 강구해봤어요.
지금은 도저히 다른 방법이 없는 것 같아요. 심적으로 어려우시더라도 투자자를 구해서 경영권을 넘기시는 길 밖에 없어요.」
김재진이 지난 7년간 모든 것을 다 바쳐 쌓아놓은 <주간충남>을 넘겨야 한다는 말이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돈으로는 사고 팔수 없는 더 중요한 존재일 수 있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었고 저 세상으로 떠나보내기도 했다. 운영자로서 책임감을 느끼면서도 나름대로 기쁨을 맛보고 만족감도 있었다. 미친 듯이 그의 정열을 쏟아 부으면서 빠져들었던 삶의 애환이 있었다. 이제 그런 모든 것들을 낯선 사람에게 훌쩍 넘겨주라고 그런다. 더 이상 김재진이 운영하기에는 힘이 턱 없이 모자란다. 이제 한계라는 것이 눈앞에 보인다.
「편집장님, 그 길만이 우리 모두가 살 길입니다. 고집을 버리시고 일단 신문이 나올 수 있 도록 결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그 투자자는 신문사 운영자금으로 10억을 내놓겠다고 했습 니다. 그리고 그 동안 고생하신 편집장님께도 5억을 건네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이번 기 회를 잡지 않으면 모두 무산되고 말 겁니다.」
「네. 알았어요. 잠시 생각해보고 말씀드릴게요.」

진현미가 돌아간 뒤 김재진의 마음은 혼란스럽다. 투자자가 그렇게 큰돈을 운영자금으로 내놓는다면 <주간충남>은 튼튼한 운영이 가능해진다. 현재의 적자상태를 일거에 뒤바꿔 놓을 수 있다. 자신에게도 5억이란 돈은 평생 만져보지 못한 큰돈이다. 다른 지역에 가서 주간신문을 하나 만들어도 자신이 있는 거액이다. 신문사도 살고 김재진도 살 수 있는 솔깃한 제안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투자자 최현범이 걸린다. 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그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전혀 모른다. 서인애가 말한 것처럼 그들이 신문사를 손에 넣을 경우 더 큰 악을 행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에게는 선택의 기회가 없다. ‘이대로 망하느냐, 마지막 기회를 잡느냐’ 두 가지 길 밖에 없다. 김재진은 밤이 새도록 고민하고 또 고민을 거듭한다. 자금을 모으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기도 하다가 저들의 거대한 음모에 분노하기도 한다. 혼자만의 고민을 짊어지고 고통의 시간이 지나간다.

다음날 오전8시30분 <주간충남>사무실에 편집장 김재진을 포함해서 6명의 구성원이 탁자 앞에 앉는다. 상황이 너무 안 좋은 때라 다들 표정이 밝지 않다. 김재진이 한참 뜸을 들이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제가 운영을 잘못해서 신문사 사정이 무척 어려워졌습니다. 저의 능력으로는 더 이상 이 끌어 갈 수 없음을 인정합니다. 다행이 좋은 투자자가 나타나서 그분에게 경영권을 넘기 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충분히 양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상황이 아주 급한 만큼 내일 까지는 계약을 성사시킬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드디어 결정이 내려졌다. 극심한 운영난을 견디지 못한 김재진이 <주간충남>을 넘기기로 결단한 것이다. 세상은 이상대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현실이 모든 상황을 지배하고 몰아간다. 김재진도 냉정한 현실에 순응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김재진은 <주간충남>을 떠나야 되는 현실이 안타깝다. 지난 10년의 청춘을 바쳐 시스템을 새롭게 만들었고 당시에 꼴등을 달리던 신문사를 영향력 1위로 만들었다. 그의 열정과 기자들의 노력이 빛을 발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순간에 들이닥친 운영난이 공든 탑을 무너뜨린 것이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주간충남>은 투자자를 잘 만나 제2의 발전을 이룰 수도 있다. 막대한 자금력을 보유하고 독보적인 언론사로 성장할 수도 있다. 김재진도 지난 10년간의 보상금을 두둑이 받아서 제2의 인생을 출발할 수 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미래가 펼쳐질 수도 있는 것이다. 김재진은 그렇게 애써 희망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날 저녁 입원실로 돌아간 김재진은 서인애의 방문을 노크한다. 그녀가 밝은 미소를 머금고 손을 잡아준다.
「신문사 일 때문에 하루 종일 바쁘셨죠?」
「인애 씨, 사실대로 말할게요. 내일 오후 2시에 새로운 투자자하고 계약하기로 했어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어요. 이게 제 운명인 것 같아요.」
「편집장님 고통을 저도 이해하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투자자를 알아 봐달라고 부탁했어요. 분명히 좋은 소식이 있을 거예요. 이래봬도 저희 아버지가 상당히 발이 넓은 분이에요.」
「인애 씨가 저를 돕는 것은 고마운데 이제 갈 길이 정해진 것 같아요.
저들의 음모가 너무 철저해서 한순간에 우리가 당해버린 느낌이에요.」

서인애는 김재진이 느끼고 있을 고통이 꼭 잡은 손을 통해 전해오는 느낌을 받는다. 이 남자를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참 괜찮은 남자라는 생각이 잠깐 머릿속을 스친다. 청수마을 납치사건에서 용감한 행동으로 자신을 보호해주었고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서인애의 마음이 들어갈 길을 열어주고 있다. 정인주를 떠나보냈는데 그 빈자리에 새로운 인연이 찾아오고 있음을 느낀다.

다음날 오후2시 <주간충남>사무실에 편집장 김재진과 모든 구성원이 탁자에 앉아있다. 한쪽 벽면에는 이정수가 준비한 현수막이 게시되어 있다.
「<주간충남>경영권 인수 계약 체결식」

잠시 후 최현범과 청수마을 청년 5명이 점령군처럼 씩씩하게 들어선다. 그들의 음모가 성공한 것을 자축하는 듯 여유가 넘쳐흐른다.
이정수와 신미연이 일어나서 깍듯하게 인사를 올린다. 대통령을 맞이하는 것보다 더욱 정성스러워 보인다.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 앉자 이정수가 미리 준비한 계약서 1부를 최현범과 김재진 앞에 놓는다. 최현범을 수행한 청년회장 민주혁과 청년들이 사과박스 하나씩을 들어다 탁자 옆에 쌓아 놓는다. 최현범이 그 박스를 가리키며 말한다.
「저기 사과박스 보이지? 한 박스 당 현찰로 2억씩 들었단 말이지.
오늘 계약서에 싸인 만하면 바로 15억이 넘어가는 거야. 물론 그 중에 5억은 편집장이 경영권을 넘겨준 대가지. 우리 모두가 만족할 만한 돈이지. 안 그래?」
최현범의 말에서는 거만함이 묻어난다. 순간적으로 김재진은 이런 자에게 신문사를 넘겼다가 어떻게 될지 모를 불길함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미 되돌릴 수는 없다. 더 이상 경영권을 잡고 있을 능력이 없다. 오늘 계약하지 않으면 모두 망하고 말 것이다. 차라리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자. 잘 될 거라고만 생각하자. 애써 김재진은 마음을 다잡는다. 부정적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려고 몸부림친다.
김재진은 탁자에 놓인 싸인펜을 오른손으로 집어 든다. 한 장의 계약서를 일부러 한자 한자 꼼꼼히 읽는다. 일제의 칼날 앞에 국권을 넘겨주어야 했던 순종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순종은 대신들에게 서명을 위임하고 말았지만 김재진은 그럴 수 없다. 자신의 이름으로 서명을 강요받고 있는 것이다. 계약서의 끝 단어까지 다 읽은 김재진에게 할 일은 서명밖에 남지 않는다. 이제 서서히 싸인펜을 종이에 갖다 댄다. 그 순간 바지 주머니에서 희미한 진동이 느껴진다. 처음에는 다리가 저려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은 핸드폰의 미세한 진동임이 느껴진다.
「인애 씨, 무슨 일이죠?」
「편집장님, 싸인 하지 마세요. 투자자를 구했어요. 지금 곧 1억을 계좌이체 하신데요.」
전화를 귀에 바짝 대고 있는 편집장 김재진의 입꼬리가 과장되게 올라가더니 침울했던 눈빛에서는 섬광이 터져 나오는 듯하다. 그는 목발을 짚더니 밖으로 나가면서 큰소리로 말한다.
「계약은 취소하겠습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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