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0일 오후3시20분 시장실.
김 시장이 며칠 전 만나자는 연락을 한 후 유희석이 방문해서 두 사람이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시장님, 바쁘실 텐데 저한테 신경을 다 쓰시고...
요즘 이정수하고 친하게 지낸다는 말을 들었습니다만.」
「유 이사장, 알고 보면 우리는 몇 십 년 동지가 아니오.
지난 두 번의 선거에서도 이사장이 아니었다면 어디 됐겠습니까? 그러니 이번에도 나를 밀어 주시게. 내가 자금도 두 배로 드리겠네.」
「저도 요즘 돈이라면 있을 만큼 있습니다. 언제까지 당신이 주인집 아들인 줄 아십니까? 이젠 저에게 양보할 줄도 아셔야죠.」

유희석의 태도는 확실히 바뀌어있다. 어릴 적이나 공무원 생활할 적이나 선거운동 할 때의 모습은 완전히 없어지고 기고만장해져있다. 청수교 주인님 덕분에 시민단체연합회장에다 서주저축은행 이사장까지 하더니 옛날 소작농 아들놈의 만만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지난 시절 유희석은 주인집 아들이 주는 잔돈 때문에 심부름을 열심히 했고, 선거운동 때도 선거자금 떼어먹는 재미에 푹 빠져서 김 시장의 오른팔 역할을 충실히 했던 것이었다.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청수교 재산을 관리하던 까닭에 1천억에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고 있고, 밤의 세계를 통해 매달 수십억의 자금까지 들어오고 있는 실정에 돈 때문에 옛날 같은 아랫사람이 될 필요는 없어졌다. 결국 돈이 유희석의 인생관을 바꿔버린 것이다.

김 시장은 말이 통하지 않는 유희석을 냉정하게 돌려보내고 나서 옛 일을 떠올려 본다. 40대 초반 김정철은 서울 대기업 직장살이가 시시해졌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지원해주는 부모가 있는데 좋은 직장이란 개념이 별로 와 닿지 않았고 더 승진해봐야 의미가 없어보였다. 주위를 둘러보면 지방자치제도에 희망을 걸고 정치에 뛰어드는 친구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도 하는데 부모의 후광이 있는 자신이야 말로 확률이 높아보였다.
그 당시 정당공천이야 거액만 마련할 수 있고 인물만 어느 정도 갖춰져 있으면 큰 문제가 없는 환경이었다.
뜻을 세운 김정철은 지역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정당을 선택하여 3억 원의 공천헌금을 내고 충남도의원에 출마했었다. 부잣집 아들이 서울에서 내려와 선거에 나왔다는 말에 선거운동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당시에는 정치판에 현금이 흔하게 오고가던 시절이라서 돈 냄새 맡고 몰려온 꾼들이었다. 김정철은 소속정당과 상의하여 각 마을까지 조직책을 가동하고 쉽게 당선의 영광을 안았다. 무엇보다 인기 있는 정당을 선택한 원인이 컸다.
그가 도의회에 입성했더니 소작농 아들 유희석이 사무계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어릴 적 주인집 아들의 심부름이나 하던 그에게 김정철은 다시 상전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었다. 역시나 유희석은 푼돈 좀 쥐어주면 열심히 일하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고 또 다시 주인집 아들인 도의원의 충실한 일꾼이 되어주었다.
시간이 지나 김정철은 시장이 될 꿈을 꾼다. 처음 정치판에 들어올 때만해도 도의원 직을 맡는 것이 크게 보였는데 막상 4년이 지나다보니 더 위로 올라가고 싶은 것이 권력자의 속성이었다. 지난 도의원 기간 동안 충실한 부하가 돼 주었던 유희석이야 말로 가장 믿음직한 오른팔이었다. 주인님 아들과 소작농의 아들로 만난 인연이 40년이 넘어서도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었다.
결국 김정철은 유희석에게 선거조직 관리를 맡기며 거금 5억 원을 쥐어줬다. 당시 유희석은 말단 공무원으로 시작해서 더 이상 승진의 기회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고향에 내려가 선거운동 조직을 맡게 됐다. 김정철이 당선만 된다면 기관장 자리하나 정도 맡는 것은 문제도 아니었다. 출세도 할 수 있었지만 선거자금을 잘만 관리하면 거액이 떨어질 수도 있었다.
고향에 돌아와 보니 유희석에게 나름대로의 인맥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울 유학을 떠난 김정철은 학맥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었지만 유희석은 지역 중 고등학교까지 졸업한 덕분에 선배, 후배, 동창들만 해도 수천 명에 이르러 누구든지 학맥을 통하면 다 친해질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동창회를 통한 학교인맥을 많이 형성하게 되었고, 각 마을 단위까지 선거조직원을 비밀리에 확보할 수 있었다.
시장후보 김정철의 공식적인 선거조직은 당을 통해서 추천받은 사무장과 운동원이었다. 그러나 조직망을 갖췄을 뿐 공식적인 조직을 가지고는 감시가 너무 심해서 제한이 많았다. 이들을 통한 선거운동은 명함을 제작하고, 홍보물을 인쇄하고 의정보고서를 만들고, 각 마을마다 인사 다니는 것이었다.
이 정도의 활동은 상대후보에서도 다 할 수 있는 것이었고 당시 현직 시장을 이기려면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게다가 시장에게는 현직 프리미엄이 대단한 효과를 발휘해서 이미 연초에 각 경로당에다 선물을 돌리고 복지시설을 늘리고 마을마다 숙원사업을 우선 해결해주는 것으로 선심을 쓰고 있었다.
이렇게 프리미엄을 누리고 있던 현직 시장을 이기기 위해 만들어진 비밀조직을 유희석이 이끌고 있었다. 그는 특유의 친화력과 학맥을 동원하여 치밀하게 각 마을마다 조직원을 동원하고 있었으며 현직시장측보다 두 배의 보수를 약속하고 다녔다. 비밀 조직원들 간에도 소문이 빨라서 선거 막판에는 현직시장의 조직원이었던 이장, 반장, 새마을지도자까지 대부분 김정철 측으로 넘어간 상태였다. 조직원들은 철저하게 이중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시장 편을 들면서 보수를 받고도 두 배나 주는 김정철 측에서도 보수를 받았다. 유희석은 이중 플레이를 알면서도 조직원들에게 내색하지 않고 김정철이 당선된다면 두 배의 보수는 계속 될 것임을 강조했다.
선거 전날 밤 현직 시장 측에서는 비밀 조직원들을 동원해서 10만 원씩 든 봉투를 뿌리고 다녔다. 이미 이중플레이를 하고 있던 조직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들은 유희석은 약속대로 20만원씩 든 봉투를 똑같이 나눠주어 살포하게 만들었다. 그야말로 돈의 전쟁터였다.
다음날 선거에서 마침내 김정철이 현역 시장을 10%차로 이기고 당선됐다. 전국적으로 현역시장을 이긴 지역이 많지 않아서 당에서도 이변이라고 치켜세웠다. 철저히 돈과 조직력의 힘이 승부를 갈라버렸다. 이 승리를 얻기 위한 대가로 김정철은 40억을 썼다. 그의 숨겨진 비밀조직 책임자였던 유희석은 30억을 배당받아 5억 원을 뒷주머니에 챙겼다. 이때만 해도 그렇게 배포가 크지 못해서 더 많은 현금을 챙길 수도 있었지만 그것에 만족했다. 무엇보다 김정철의 당선은 자신에게 더 큰 행복을 보장하고 있었다.
당선된 김 시장은 역대 최고로 화려한 취임식을 치르며 업무를 시작했다. 유희석은 비선조직이었기 때문에 먼발치에서만 구경하는 입장이었다. 일등공신이었지만 세상에 내보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후 한 달이 지나자 일등공신 유희석에게 김 시장의 연락이 왔다.
「내가 자네 자리를 하나 마련했네. 도서관장 자리야!
어렵게 만든 자리이니 일단 맡아주게. 다음에 더 좋은 자리를 마련해 보겠네.」
하지만 일등공신 유희석은 황당했다. 겨우 도서관장이나 하려고 자리를 박차고 나와 김정철을 도운 것은 아니었다. 얼마 안 되는 봉급 받아가며 자리나 차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니 울화통이 터졌다. 그러나 또 자리를 만들어 본다고 하지 않는가. 일등공신을 이리도 푸대접만 하고 있지는 않겠지. 적어도 돈이라도 많이 벌 수 있는 알짜 자리하나 만들어 주겠지. 기대를 버리지 않은 유희석은 묵묵히 3년 동안 도서관장으로 평범한 생활을 꾸려나갔다. 그러면서도 유희석은 다음 선거를 대비해서 학교 인맥을 이용해 학부모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이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3년 만에 지역 학부모를 대표하는 학부모 연합대표 자리까지 올라섰다. 그러나 김 시장에게서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일등공신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대단히 서운했던 유희석은 항의의 뜻으로 도서관장직을 사임해 버렸지만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반면, 관 조직을 완전히 장악한 김 시장은 유희석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가 선거자금에서 거액을 챙겼을 것은 뻔하고 도서관장까지 주었으니 그 정도면 만족할 것으로 생각했다. 유희석의 욕심을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다시 4년의 임기가 끝나고 선거를 두 달 앞둔 어느 날 유희석이 김 시장을 만나러 찾아왔다.
「시장님, 정말 저와의 인연을 끊을 생각입니까? 이거 너무하지 않습니까? 상대편에서도 오 라는 데 마지막으로 옛정을 생각해서 찾아왔습니다.」
「내가 자네를 잊을 리야 있나. 자네가 이번 선거에서도 많이 도와줘야지!」
사실 김 시장은 지난 4년 동안 관 조직을 장악해서 현직프리미엄을 업고 선거운동에 돌입해있었다. 그러나 학부모연합대표 유희석의 조직력이 상대후보를 민다면 큰 타격이 될 수도 있었다. 상대진영으로 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김 시장은 며칠 후 측근을 시켜서 유희석에게 10억의 선거자금을 전달했다. 이제 능구렁이가 된 유희석은 최대한 많은 돈을 뒷주머니에 챙길 속셈이었다. 두 달 후 김 시장은 관변조직들의 비밀선거운동에 힘입어 무난히 2선 시장에 당선될 수 있었다.

또다시 4년이 지난 지금, 또 다시 선거의 계절이 3달 앞으로 돌아온 것이다. 3선에 도전하는 김 시장에게 가장 위험한 적수는 유희석이다. 어릴 적 주인집아들과 소작농의 아들이 한 판 승부를 펼쳐야 하는 재미있는 싸움이 예고되고 있다. 현직 프리미엄을 가진 김 시장에 비해 급한 쪽은 도전자 유희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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