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성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교수의 鄭臣保論(정신보론)


# 南宋 性理學(남송 성리학)의 高麗傳來(고려전래)


고려 고종 24년(1237) 한반도의 서산 간월도(看月島)에 정착하여 고려 학인들에게 이정(二程)의 성리학을 전수하였던 남송 출신의 학자 정신보(鄭臣保)의 행적이 학계에 알려지게 된 것은 근자의 일이다. 남송 말기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정신보가 바다를 건너 고려로 올 수밖에 없었음은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이해할 수 있다. 또 그가 남송의 명문 포강정씨(浦江鄭氏) 가문의 후예라는 점에서, 당시 남송 학계를 주도했던 성리학으로 무장하였을 것이며, 동래(東來)한 뒤에도 성리학을 이 땅에 전파하였을 것임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고 본다.

정신보의 아들인 정인경과 사돈 관계였던 첨의밀직사사(僉議密直司事) 채모(蔡謨: 1229~1302)는 「원외랑 묘갈명」에서 “公以性理之學, 敎誨生徒, 東方之人, 始得覩兩程之書”라 하여, 정신보가 정명도․정이천의 학문을 고려에 처음으로 전하였음을 밝혔다. 현재 학계에서는 성리학의 최초 전래시기를 고려 충렬왕 16년(1290)으로 잡고 있다. 안향(安珦)이 충렬왕 15년에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갔다가 주자서(朱子書)를 접하게 되고, 이듬해 귀국하면서 이를 가져와 주자학을 전파했다는 기록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자성리학의 전래를 말한 것이다. 정신보가 고려로 올 적에는 중국에서 주자학이 널리 전파되기 이전이었고, 이정(二程)의 학문이 더 알려졌던 시절이었다. 고려 중기에 고려의 학인들 중에는 이정의 명성을 접한 사람들이 있었고, 이들 가운데 일부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이정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한다. 고려 인종은 송나라에서 파견한 사신에게 이정의 제자인 구산(龜山) 양시(楊時)의 안부까지도 물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면, 당시 중국 남방에 널리 알려진 이정의 학문이 정신보에 의해 고려에 들어왔다는 것은 늦은 감이 있다고 할 것이다.

현재 정신보가 이정의 성리학을 고려에 전파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것으로는 「원외랑 묘갈명」 등 주로 서산정씨 집안에 내려오는 구전(舊傳) 자료가 있을 뿐이다. 여러 방증 자료들이 없지는 않지만, 이 역시 사실을 실증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학계에서 정신보의 성리학 전파를 공인 받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이에 필자는 우선 ‘정신보는 과연 어떤 인물인가’라는 점부터 조명하면서, 사료를 더 발굴 보완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보의 발자취에 대한 연구조차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성리학 전파를 주장하는 것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본고에서 정신보의 위인(爲人)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고찰하려 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 고려 학풍의 변화와 성리학 전래의 과정

필자는 일찍이 성리학의 전래와 수용까지의 고려 학풍의 변화 과정에 주목하여 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그 결과, 13세기 말 주자성리학이 원나라로부터 들어오기 이전 12세기부터 이미 북송의 도학이 고려에 전래하였고, 무신정권 시기에도 일부 학인들에 의해 성리학의 전통이 전해졌음을 밝혀낼 수 있었다. 중국 학풍의 변화가 큰 시간적 거리 없이 고려 학계에 전해졌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덕무(李德懋: 1741~1793)의 다음과 같은 지적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대개 우리나라의 문교를 중국과 비교하면, 언제나 퇴보하여 수백 년이 지난 뒤에야 조금씩 진보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유행하는 것은 중국에서는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어 염증을 느낀 것들이다. 비유하면, 대봉(岱峯)에서 해돋이를 봄에 있어, 새벽닭이 울고 아침 해가 이미 떠올랐건만 하계(下界)의 사람들이 아직 꿈속에 있는 것과 같다. 또 아미산의 눈이 5월이 되어서야 녹는 것과 같다.>

돌이켜 볼 때, 고려의 유학은 초기의 경사(經史)․사장(詞章) 중심의 유학으로부터 중기의 북송 성리학의 도입을 거쳐 말기 주자학의 수용에 이르기까지 세 번의 변화를 거쳤다고 할 수 있다. 고려 유학사를 논함에 전․후기로 가를 만큼의 사상사적 변화는 12세기 예종․인종시대 북송 학술의 수용으로부터 그 시단을 열었다고 하겠다. 이 시기에는 북송의 도학뿐만 아니라 왕안석(王安石) 일파의 신학(新學)까지 수용되었다. 문학 면에서도 정취(情趣)를 중시하는 당대문풍(唐代文風)은 물론 철학적 이취(理趣)를 중시하는 송대문풍(宋代文風)도 수용되었다. 주자에 의해 집대성되기 이전의 북송 성리학이 12세기 초를 전후한 시기에 우리 학계에 도입되었다는 것은, 후일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걸쳐 원나라로부터 주자학이 도입된 사실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북송 성리학의 도입과 관련한 단서로는, 최충(崔沖: 984~1068)이 세운 구재학당(九齋學堂)의 명칭 대부분이 󰡔중용󰡕․󰡔대학󰡕 및 󰡔주역󰡕에 나오는 용어이거나 그와 유사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다음, 요․순과 주공(周公)․공자를 중심으로 하여 인(仁)․효(孝)를 유학의 근본사상이라고 여기는 고려 초기까지의 고대 유학이, 예종․인종․의종의 삼대를 즈음하여 인(仁)․의(義)를 부르짖는 공맹학(孔孟學)으로 서서히 변화한 점을 들 수 있다. 이것은 금석문을 비롯한 당시의 여러 자료에서 폭넓게 증명되고 있다.

북송과의 활발한 학술 교류 역시 빼놓을 수 없다. 󰡔화해사전(華海師全)󰡕․󰡔동방연원록(東方淵源錄)󰡕 등을 보면, 김양감(金良鑑)․윤관(尹瓘)․윤언이(尹彦頤) 등이 송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이정(二程) 또는 그의 문인들과 학문적으로 교유했던 사례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이것은 인종 1년(1123)에 고려에 온 송사(宋使) 노윤적(路允迪)과 부묵경(傅墨卿)에게 인종이 구산(龜山) 양시(楊時: 1053∼1135)의 안부를 물었던 사실(󰡔宋史󰡕, 「道學傳(二)」)로도 증명된다고 하겠다. 양시는 이정의 문인으로 당시 무명의 선비에 불과하였다.

다음, 예종․인종․의종 삼대를 기점으로 강경풍(講經風)이 고조되었던 사실과의 연관성을 들 수 있다. 당시 강론에서 󰡔예기󰡕의 한 편인 󰡔중용󰡕이 󰡔주역󰡕과 함께 중시되었다는 사실은 성리학의 학문 경향과 상통하는 바 있다. 이것은 유학을 철학적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는 만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청연각(淸讌閣)에서의 강경 내용이 성리학적 색채를 띤 것이었음을 증언한 자료도 있다.

한편, 11세기 후반 무렵, 당시 북송의 학계와 정계를 이끌던 사마광(司馬光)․왕안석(王安石)․문언박(文彦博) 등 구법당․신법당 학자들 모두가 고려 학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북송 학술의 수용은 도학뿐만 아니라, 도학과 대립하였던 신학(新學) 등에 이르기까지 폭이 넓었다. 북송 도학의 수용에 따른 성리학의 이해는 무신 집권기에도 일부 학자들에 의해 전승되어, 마침내 리기론(理氣論)이 전개되기에 이른다. 고종 때의 학자 정의(鄭義)의 ‘도(道)가 일화(一和)를 거느리니 홰나무와 귤나무가 합하여 하나로 된다’(「道閱一和槐橘合爲兄弟賦」)는 제목의 부(賦)를 보면, ‘부’라는 문체에 리기론이 등장한다.

<논하건대, 기(氣)가 모인 것은 같거나 다름이 있지마는, 리(理)가 주관하는 바는 비록 (物이) 다르더라도 반드시 같은지라, 저 두 가지(槐橘) 것이 합하여 일화(一化)의 혼융한 상태로 돌아감이 마땅하리라.> 議夫氣之所鍾, 有同而異, 理之所管, 雖異必同, 宜彼二般之合, 歸于一化之融. (󰡔동문선󰡕, 권2)

조정에서 성인의 지극한 도를 밝혀 백성들을 순화시킴으로써 모두 화합을 이루게 한 것을, 마치 개개의 생령(生靈)들이 도의 지대한 조화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에 비유한 내용이다. 성리학에서 말하는 ‘리일분수(理一分殊)’에서 ‘리일’의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또 이제현(李齊賢)의 󰡔역옹패설(櫟翁稗說)󰡕에서, 이제현보다 약 1세기 정도 앞서 살았던 안사준(安社俊)이 ‘주자장구(朱子章句)’와 ‘채씨전(蔡氏傳)’에 의거하여 경전을 해석하였다고 중언한 것은, 이미 13세기 초를 전후하여 정주성리학이 전래되었음을 알리는 중요한 단서라 할 수 있다. 이를 볼 때, 경사․사장 중심의 유학이 주자학의 도입에 앞서 고려 중기 예종․인종시대를 전후로 서서히 종언을 고하였음을 알 수 있겠다. 그러나, 북송 성리학의 학풍은 이후로 지속되지 못하였다. 공교롭게도 고려의 무신 집정기(1170∼1270)와 남송(1127∼1279)이 마주하는 시기에 고려에는 안팎으로 여러 가지 좋지 않은 사정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북송시대의 성리학이나 주자에 의해 집대성된 남송 성리학의 내용은 임춘(林椿)․권돈례(權敦禮)․정의 등 일부 소수의 학자들에 의해 전해졌을 뿐이었다. 무신란 이후, 문치(文治)를 베풀 만한 여건이 다소 갖추어진 12세기 말에도 상황은 그리 호전되지 못하였다.

고려 말 주자성리학의 전래는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12세기부터 일부 학자들 사이에 수용되기 시작했던 성리학의 여맥(餘脈)이 잔존하지 않았다면, 성리학의 진가를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예비적 지식 없는 상태에서 그것의 전래와 수용이 가능할까? 당시 고려의 학술적 정황을 고려할 때, 고려 고종 24년(1237)에 남송에서 망명한 학인에 의해 이정의 성리학이 동방에 전해졌다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또 일방적인 전래가 아닌 주체적인 ‘수용’일 수도 있음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 정신보의 家系와 浦江鄭氏

조선 말기의 문인 운양(雲養) 김윤식(金允植: 1835~1922)은 한 시에서 다음과 같이 읊은 바 있다.

<約遵藍田呂 향약은 남전여씨(藍田呂氏)를 따르고
義效浦江鄭 충의는 포강정씨를 본받으려네.>

중국 남송 때의 명문 포강정씨가 남전여씨와 함께 조선조 말기까지 사인(士人)들 사이에서 ‘본받아야 될 집안’의 대명사로 널리 알려져 왔음을 짐작하게 한다.
‘누세동거(累世同居)’로 유명한 포강정씨의 문풍(門風)은 종족 간의 돈목(敦睦)을 중시했던 조선시대 유자들에게 기림의 대상이 되어 왔다. 또 정씨 가문에 내려오는 가범(家範)은 예학적 차원에서 연구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또 포강정씨 가문에서 실천한 지도층의 정신적 의무(Noblesse Oblige)는 지난날 중국은 물론 우리나라 지도급 인사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정신보는 본디 중국 남송 말기 사람이다. 포강정씨의 후예다. 그의 출자(出自)가 중국 강남의 명문 포강정씨라는 사실은 그동안 학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아는 사람도 드물었지만, 안다고 하는 사람들도 그의 가계에 대해 의문을 표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서산정씨 족보를 보면, 정신보의 증조부까지만 실려 있고, 그나마 그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근자에 중국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포강정씨의 원류(源流)가 밝혀졌고, 정신보와 관련한 역사적 사실도 전에 비해 신뢰도가 높아지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보의 가계와 생애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상당하다. 자료 발굴과 철저한 고증이 필수적이다.

정신보의 고향은 절강성(浙江省) 금화부(金華府) 포강현(浦江縣)이다. 그의 가문은 ‘포강정씨’로 널리 알려졌으며, 포강의 북쪽에 모여 산다고 하여 ‘포양정씨(浦陽鄭氏)’라고도 일컬어졌다. 또 남송 이래 ‘의(義)’를 중시하는 대표적인 가문이라 하여 ‘의문정씨(義門鄭氏)’라 불리기도 한다. 남송대부터 명대에 이르기까지 15대에 걸쳐 ‘누세동거(累世同居)’로 유명하여, 후일 명나라 태조 홍무제(洪武帝)가 ‘강남제일가(江南第一家)’라는 친필 편액을 하사하였다고 한다(1385).

이처럼 ‘포강의문’은 중국 천하에 알려진 명문 가운데 명문이다. 뒷날 치가지례(治家之禮)와 목린지법(睦隣之法)의 본보기를 찾는 사람들은 북송 시기 남전여씨의 ‘향약’과 함께 남송 시기 의문 정씨 ‘가범’을 꼽았다. 세칭 의문정씨는 ‘의문정씨가의(義門鄭氏家儀)’ 또는 ‘의문정씨가범(義門鄭氏家範)’을 만들어 이를 가규(家規)로 받들어왔다. 처음 58조였던 가규는 후대로 가면서 증손(增損)을 하여 168조에 이르렀다. 명나라 건국 뒤 법률 제도를 만들 때 남본(藍本)이 되었다고 한다.

다음, 의문정씨의 내력과 정신보의 조상에 대해서 살피기로 한다. 󰡔의문정씨족보󰡕에 따르면, 정씨는 춘추시대 주(周) 나라 선왕(宣王)이 이복동생인 왕자 우(友)를 ‘정(鄭)’ 지역의 제후로 봉한(B.C. 806)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왕자 우가 바로 정나라 환공(桓公)이다. 후일 환공의 자손들은 나라 이름을 따서 성씨로 삼아왔으며, 주로 정주(鄭州) 형양(滎陽)에 세거하였다. 이런 연유로 정씨의 출자(出自)를 ‘형양’이라 하는 경우가 많다.

후일 북송 때 안휘성(安徽省) 흡현(歙縣)의 현령을 지냈던 응도(凝道: 字伯定)라는 사람이 정주 형양으로부터 흡현으로 옮겼고, 이어 응도의 아들로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지낸 자유(自牖: 號孟納)가 흡현에서 다시 엄주(嚴州) 수안현(遂安縣)으로 이사하였다. 한편, 자유의 손자인 회(淮: 字巨淵)가 남송 철종 원부(元符) 2년(1099)에 정악(鄭渥)․정세(鄭涗) 두 형과 함께 수안현으로부터 포강현으로 옮겼다.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은 금화부 포강현 감덕향(感德鄕) 인의리(仁義里) 백린계(白麟溪)였다. 당시 고을 사람들은 정회 삼형제가 함께 옮겨와 서로 화목하게 사는 것을 보고는 ‘훈지상응(塤箎相應)’이라 칭송하였으며, 또 ‘포양삼정(浦陽三鄭)’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한다.

포강정씨는 이후 정회의 셋째 아들 정조(鄭照)를 거쳐 조의 두 아들 온(縕: 沖應)과 기(綺: 沖素)의 대에 이르러 ‘천하제일 의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정온은 정신보의 증조부이다. 중국 의문정씨의 시조인 정기는 방증조부가 된다. 정온․정기 형제는 건염(建炎: 1127~1130) 초에 오늘의 ‘강남제일가’에 터를 잡아 살면서 의문(義門)을 일구었다. 이들이 동거제일세조(同居第一世祖)이다.

󰡔의문정씨종보(義門鄭氏宗譜)󰡕에 따르면, 형 정온은 자가 종순(宗醇)이다. 15세에 이미 문학적 명성을 날렸으나 20세에 요절하였다. 뒷날 그가 남긴 글들을 모아 󰡔충응집󰡕 3권으로 엮었다고 하는데 오늘에 전하지는 않는다. 부인은 응림(應霖)이며 자세한 인적 사항은 알 수 없다. 아우 정기의 생몰 연대가 ‘1118~1193’(향년 76세)인 점으로 미루어 정온이 태어난 해를 어림 짐작할 수 있겠다.
정온이 20세에 세상을 떠난 것을 고려할 때, 그가 남송 조정에서 3품직인 판장작감사(判將作監事)를 지냈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은 것 같다. 조년등과(早年登科)한 사례가 적지 않지만, 오늘날 건설부에 해당하는 장작감의 장관직을 약관의 나이에 지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위 󰡔종보󰡕에 의하면, 충응처사 정온은 후사를 두지 못하여, 아우 정기의 장남 한(閑)을 입적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종법을 중시했던 의문정씨 가문에서 적적상승(嫡嫡相承)을 위한 출계(出系)는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서산정씨족보󰡕 및 그에 근거한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을 보면, “정신보의 증조부 정응충(鄭應冲)은 송나라에 벼슬하여 판장작감사를 지냈고, 조부 정의(鄭儀)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아버지 정수거(鄭秀琚)는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郞)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정신보의 증조부를 ‘정응충’이라 기록한 것은 중국의 의문정씨와 서산정씨가 한 뿌리임을 증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본다.

󰡔서산정씨족보󰡕 등에 ‘정응충’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은 잘못이다. 위 󰡔족보󰡕에서는 ‘應冲’이라 적었고, 서산정씨대종회 홈페이지 <원시조(元始祖)> 조에는 “원외랑공의 증조부 휘(諱) 온(縕), 호 충응(沖應)은 송나라 조정에서 종삼품인 판장작감(判將作監)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이밖에 ‘忠應’, ‘衝應’ 등으로 적은 사례도 있다. ‘온’이라는 휘를 쓰지 않고 ‘충응처사(沖應處士)’라는 호를 휘자(諱字)처럼 쓴 것은 이례적이다. 게다가 그마저 ‘應冲’, ‘忠應’, ‘衝應’ 등으로 잘못 적음으로써 조상에게 큰 실례를 범하였다.

정온의 아우 정기는 자가 종문(宗文)이고 호가 충소처사(沖素處士)이다. 정온이 죽은 뒤 의문정씨 가문의 치가(治家)를 주도하였다. ‘충소처사’란 호는 남송 효종 건도(乾道) 연간(1165~1173)에 황제가 내린 사호(賜號)라고 한다. ‘충’은 󰡔노자󰡕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철학적 개념이다. “텅빈 충만”이란 의미의 대영약충(大盈若沖)에서 따온 것이라 생각된다. 마음을 비우고 비워서 더 이상 비울 것이 없을 때 세상 모든 것이 내 소유가 된다는 역설의 진리를 담은 것이다. ‘충’ 자를 마음의 바탕으로 삼으라[以沖素之]’는 뜻을 지닌 정기의 호와 마찬가지로 정온의 호 ‘충응’ 역시 ‘이충응지(以沖應之)’의 의미를 지닌다. 두 형제가 모두 노자의 ‘비움’의 철학을 담은 ‘충’ 자로 호를 삼은 점이 예사롭지 않다. 황제의 사호는 그의 호를 국가에서 공인하면서 ‘충소처사’라 한 데 의미가 있다.

충응처사 정온의 후사는 공식적으로 양자를 통해 이어 왔다. 한국 서산정씨의 뿌리가 되는, 정온 → 정의 → 정수거 → 정신보로 이어지는 일계(一系)는 위 󰡔종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기록한 것일까, 아니면 특수한 사정 때문에 빠진 것일까? 현재로선 어느 쪽이라고 분명히 말하기 어렵다. 의문정씨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온 절강대학 모책(毛策) 교수도 이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않은 채 󰡔서산정씨족보󰡕에 실린 위 일계를 소개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의문정씨 가규를 보면 짐작되는 바 있기는 하다. 가규에 따르면 철저하게 종자(宗子) 중심, 가장(家長) 중심의 종법(宗法) 질서를 추구하고 있다. 가규에 적서(嫡庶)에 대한 명문 규정은 없지만, 󰡔예기󰡕 「상복(喪服)」 편 등에 규정된 종법 질서 자체가 ‘적서’의 구별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정씨 가문에서도 이를 준용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게다가 남송 시기에 봉건강상(封建綱常)을 강조했던 춘추학이 일세를 풍미했던 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더욱이 정신보가 살았던 절강 지역의 학풍이 도통(道統)을 중시하여 거의 종법처럼 받들었고, 성리학의 리일분수설(理一分殊說)로 사회를 해석하면서도 ‘분수’에 중심을 두었던 것도 예사로 보아넘길 일이 아니다. 그것이 후일 금화학파의 학풍이 되었음에 비추어 볼 때, 당시 이미 종법 질서가 자리를 잡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정온이 20세에 적자(嫡子) 없이 요절하자 입후(入后)하여 대를 잇게 한 사실은 이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온 → 정의 → 정수거 → 정신보로 이어지는 계통은 적통이 아닐 가능성이 높고, 그 때문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 빠진 사유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정신보가 고려에 귀화함으로써 그 일계가 독립하게 되었으니 󰡔예기󰡕에서 이른바 “별자(別子)가 따로 시조가 된다”(別子爲祖)거나 “별자를 계승하여 종파를 따로 연다”(繼別爲宗)고 한 설들을 현실에서 구현한 것으로 보는 편이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1998년판 󰡔서산정씨대동보󰡕를 보면, 정온(정충응) 이상은 실려 있지 않다. 정온의 대수(代數)도 자세하지 않다고 한다. 이것은 가승(家乘)의 미비일까? 󰡔서산정씨족보󰡕에 실린 원조(元祖: 정신보) 이상의 계통은 전적으로 정신보의 증언을 따라 기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정신보의 증조부 정온까지만 계통이 밝혀져 있는 데에는 누락이나 미비보다도 ‘의도적’ 성격이 강하다고 생각한다. 정신보가 증조까지의 계통만 밝힌 것은, 고국인 송나라를 떠나 고려에서 새로운 삶을 펼쳐야하는 자신의 입장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려 한 것이라고 본다. 자신의 뿌리가 의문정씨 동거 제1세인 정온에 닿는다는 점을 시사하면서도 ‘별자위조’의 관점에서 위로 증조까지 자신의 직계만을 수록한 것이라 생각한다. 또 정신보가 남송에 처자를 두고 왔을 가능성이 높음에도 그에 관련하여 한 마디 단서도 남기지 않은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서정(瑞鄭)의 후손들이 정신보를 ‘동천조(東遷祖)’라 일컫는 것은 조상의 유의(遺意)를 잘 읽은 것이라 하겠다.

정신보의 본래 이름이 ‘표(彪)’였다는 사실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고친 이름인 ‘신보’는 “신하의 절개를 보전한다”(保其臣節)는 의미일 터이니, 고려로 온 뒤에 개명한 것으로 짐작된다. 정신보는 새로 고친 이름에도 남송에 대한 충절을 담았다. 의문정씨 후예답다고 할 것이다. 고려에서 새 삶을 펼치려는 마당에 마음가짐을 확실히 하겠다는 의미에서 개명을 했다고 볼 때, 정신보가 ‘새로운 출발’에 큰 의미를 부여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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