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우리고장 호국영웅을 알자(3)

▲ 김풍익 중령

우리고장에 나라를 위해 헌신한 호국영웅들이 누가 있을까.

목숨 바쳐 나라를 지키고 기여한 우리지역 출신의 영웅들을 과연 우리 지역민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러한 고민을 해온 충남서부보훈지청에서는 최근에 ‘우리고장 호국영웅 알리기’에 발벗고 나서서 눈길을 끌고 있다.

평소 관내 홍성군 · 예산군 · 아산시 · 서산시 · 보령시 · 당진시 · 청양군 · 서천군 · 태안군 호국영웅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려 호국정신을 함양하고 남북통일 달성을 위한 튼실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호국영웅 편지봉투 및 우표 제작 · 청사 호국영웅 홀 설치, 각종 호국영웅 알리기 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중 하나로 충남서부보훈지청과 함께 우리지역 출신 호국영웅에 대한 인물을 소개하는 코너를 본지에서도 마련하기로 했다.

정현종 충남서부보훈지청장은 “그간 관내 호국영웅들을 국민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무언가 체계적이고 심도 있는 홍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역신문을 통해 소개되는 호국영웅들에 대하여 잘 알고 관내 국민들이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나라사랑정신 및 호국정신을 함양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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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인물로 김풍익 중령을 소개한다.

김풍익 중령은 1921년 8월 6일에 충청남도 예산군 신양면에서 태어났다.

서울에 있는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1948년 8월 17일에 육군사관학교 제7기 특임으로 입학하여 소정의 군사교육과 훈련을 마치고 같은 해 10월 12일에 육군 소위로 임관했고, 소령으로 진급한 후 1950년 5월 5일에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에 보임되었다.

6.25전쟁이 시작될 무렵 국군은 북한군이 보유한 소련제 T-34형 전차에 대응할 만한 장비를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군은 대전차장비로 57㎜ 대전차포를 일부 보유하고 있었지만 탄약의 부족과 운용법의 미숙으로 인해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했으며,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전투기나 전차는 단 한 대도 보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또한 수류탄이나 화염병을 이용한 공격도 궁여지책에서 나온 발상으로 개전 초기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국군 제7사단이 담당하고 있던 동두천 및 포천 일대에서는 제105전차여단을 보유한 최정예의 북한군 제1군단이 서울을 점령하기 위해 공격을 가해 왔고, 북한군의 남진을 저지하던 국군은 적 전차의 포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후퇴를 계속했다.

20여 대의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더 이상 방어가 불가능해진 수경사 제3연대는 어둠을 이용하여 축석령과 금오리 중간의 155고지와 202고지로 후퇴하여 새로운 방어선을 형성했는데, 이 방어선은 의정부는 물론 수도 서울의 방어까지 좌우하는 중요한 전선이었다. 따라서 육군본부는 이곳에서 적을 격멸하고 반격을 시도할 목적으로 육군포병학교 제2교도대대 2포대의 105㎜포 5문을 배치시켰다.

대대장으로 취임하자마자 포술 훈련에 진력하고 포병 운용과 작전에 뛰어난 식견을 가지고 있던 포병학교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6월 25일 21시경 "의정부지역으로 출동하여 화력지원임무를 수행하라"는 육군본부의 명령을 받고 서울 용산에 있는 육군포병학교를 출발하여 다음날 새벽에 금오리 방어선에 포진했다.

이때 장세풍 대위가 지휘하는 2포대는 적 전차의 유일한 접근로인 도로변에 5문의 포를 배치하고 진지편성을 완료하는 한편 사격준비태세를 갖추었다. 6월 26일 3시경 김풍익 소령은 장세풍 대위와 함께 지프차를 타고 축석령 지역을 정찰하면서 적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다.

축석령 정상의 포병관측장교로부터 송우리에서 패한 국군이 철수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그는 진지로 복귀하여 장세풍 대위와 최진식 중위를 불러 "우리가 이 금오리 방어선에서 적의 침공을 저지하지 못하면 의정부는 물론 서울의 방어까지 불가능해진다. 특히 이곳에서 우리 임무는 105㎜ 야포로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 데 있다. 따라서 나는 이미 죽음으로써 이 방어선을 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귀관들도 나의 뜻에 따라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6월 26일 7시경 제2포대 진지에서는 적의 전차들이 출현했다는 보고와 사격요청이 무전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곧이어 최진식 중위의 사격지휘에 따라 제2포대의 포가 불을 뿜었다. 포탄은 그대로 적 전차에 명중했지만 적 전차는 잠시 뒤뚱거릴 뿐 돌진을 계속했다. 당황한 관측반은 제2포대의 사격을 재촉했다. 포대장 장세풍 대위는 사격으로는 적 전차의 돌진을 저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마지막으로 육탄공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때 대대장 김풍익 소령이 그들 앞에 나타나 "보병은 몰라도 포병은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미 내가 진지를 설정하고 왔으니 기준포를 끌어와라!" 라고 명령했다. 마침 기준포가 고장이어서 제6번포가 지명되었다. 그리고 나머지는 최진식 중위의 지휘 하에 지원사격을 위해 대기하기로 결정했다.

진지는 축석령 하단부에 있는 전방이 잘 보이는 급커브길 부근이었다. 장세풍 대위는 포반원들로 하여금 신속하게 포를 방열시키도록 한 후 대대장 김풍익 소령을 바라보았다. 적 전차의 캐터필라 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김풍익 소령의 비책은 근거리 직접조준사격으로 전차의 궤도를 명중시켜 파괴하는 것이었다. 포병이 창설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당시로서는 착안해내기가 매우 어렵고 죽음을 각오해야만 행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김풍익 소령은 북한 전차가 50m 앞까지 다가오기를 기다려 105㎜ 야포를 직접 조준 발사하여 적 전차의 궤도를 파괴했고, 궤도가 파괴된 적 전차는 급회전을 하면서 도로 한복판에 주저앉고 말았다. 대전차포도 아닌 일반 야포로 적의 전차를 격파하는데 성공한 김풍익 소령은 제2탄을 장진할 것을 명령했고, 장세풍 대위는 신속한 동작으로 포탄을 장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때 커브길에 나타난 적의 2번 전차가 포격을 가해 왔고, 이에 6번포와 105㎜ 야포 모두 굉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또한 김풍익 소령과 장세풍 대위는 피투성이가 된 채 부서진 야포 곁에 쓰러졌는데, 김풍익 소령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에도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적의 2번 전차는 파괴된 전차가 도로를 막고 있어 전진이 불가능해지자 결국 다시 커브길을 돌아 후퇴했다.

김풍익 소령을 포함한 포대원들의 활약은 당시 거칠 것 없이 남하하던 적의 서울 침공을 지연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고, 공포의 대상이던 북한 전차에 대한 두려움을 불식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그의 전공을 기리기 위해 1950년 8월 28일에 육군 중령으로 1계급 승진시켰고, 동년 12월 30일에 을지무공훈장과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서해안신문 류병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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