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현장탐방] ‘제 7회 칠지도 제작 도장공 추모제 및 서산시민 안전기원제’

 

‘칠지도(七支刀)’라면 역사학자들 이외에 일반인들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유물이다.

본래 육차모(六叉鉾, ろくさのほこ)라는 이름으로 전해져 왔으나, 1873년 일본 이소노카미 신궁의 대궁사(大宮司) 간 마사토모[菅政友]가 칼날에 새겨진 명문을 발견하면서 칠지도로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1953년 일본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이소노카미 신궁에 소장되어 있다.

그런데 칠지도는 광개토대왕비와 더불어 고대 일본과 한반도의 관계를 알려주는 가장 오랜 사료라고 하며 서산시 지곡면 도성3리 쇠팽이마을 대장간에서 제작된 것으로 밝혀지고 있다.

지곡면 도성리는 예로부터 양질의 철이 생산되는 곳이라 하여 지명이 ‘철동(鐵洞,세펭이)’이라 불리었고 철을 다루는 훌륭한 야철 기술자들이 많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또 칠지도는 삼국시대 백제의 ‘곡나’(谷那, 지금의 지곡면 도성리)지방에서 만들어져 일본에 전해졌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이와 관련 지난 17일 ‘제 7회 칠지도 제작 도장공 추모제 및 서산시민 안전기원제’가 ‘칠지도야철지기념비건립추진위원회’(박병석 위원장)의 주관으로 서산시 지곡면 도성3리 마을회관에서 열렸다.

행사 관계자에 의하면 칠지도는 길이 74.9cm 크기로 만들어진 양날의 칼로서 원줄기를 포함하여 여섯 가지로 총 일곱의 가지를 가지고 칼날의 양면에 61자의 금으로 상감된 명문이 새겨진 칼이다. 이러한 칼이 만들어진 지곡면 도성리에서는 매년 이 칼을 만든 도장공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서 매년 초복 날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이 추모제는 대장간 건축과 함께 칠지도를 반환받아 조상님들의 기술을 후손들에게 알리는 기회가 되도록 하는 것이 목표로서 2010년 이기학 전 지곡면장 재직 시 1회를 시작으로 올해 7회째를 맞이하고 있다.

박병석 추진위원장은 “우리 마을이 1970년대 초반까지 철광산을 운영하여 칠지도 제작에 필요한 사철이 나온 것이 확실하다.”라며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학술세미나를 2회 개최하였으며, 향토사학자 이은우, 지곡문학회장 유충식, 서울문화예술대학 오순제 교수, 충남대 노태현 교수, 공주대학 정재윤 교수, 공주대 조남철 교수, 계명대 노중국 명예교수 등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고, 면내 기관단체장님들과 동네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매년 뜻있는 추모제가 진행된다.”고 말했다.

이기학 추진위원은 "이곳 도성리는 옛부터 쇠, 철이 많이 나와 쇠팽이마을이라고도 불렸다. 이곳에 있었던 옛 대장간을 세우기 위해 국회를 방문하여 당위성을 설명하는 등 대장간의 옛 모습 복원을 위해서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칠지도는 현재 일본 나라현 덴리시의 이소노카미신궁에 보관되어 있어 이를 반환 받아야 한다는 것이 학계와 지역 주민의 염원이다.

 

= 칠지도, 어떤 역사적 유물인가

단철(鍛鐵)로 만든 양날의 칼로 전체 길이는 74.9cm이며, 칼날의 길이는 65cm이다. 칼의 좌우로 각각 3개씩의 칼날이 가지 모양으로 뻗어 있어 칠지도(七支刀)라고 부른다. 칼의 양면에는 60여 자의 명문(銘文)이 금상감(金象嵌) 기법으로 새겨져 있다. 무기로서의 실용성보다는 제의(祭儀) 등에서 상징적인 용도로 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칠지도에 대해 간 마사토모는 명문에 나타난 ‘태□4년(泰□四年)’을 중국 서진(西晋)의 연호인 태시(泰始) 4년으로 해석해 268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1945년 이후에는 이를 동진(東晋)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으로 해석해 칠지도가369년에 제작되었다는 설이 통용되었다.

하지만 한국 학자들은 삼국의 기록에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한 사례가 드물다는 점에서 동진의 연호를 기준으로 제작 연대를 보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오히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이나 전지왕(腆支王) 때의 독자적인 연호를 나타낸다고 보는 학설이 있다. 또한 ‘십□월(十□月)’을 11월로 보아 11월 16일에 병오(丙午)의 간지가 나타난 408년에 제작되었다고 보는 학설, 북위(北魏)의 연호인 태화(太和) 4년(480년)을 제작 연대로 보는 학설이 있다. 일부 학자는 금상감 기법으로 장식된 칼이 5세기 후반 이후가 되어서야 나타난다는 점에서 칠지도를 6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간 마사토모는 칠지도가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실체를 뒷받침해 주는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서기>에 진구황후 49년에 신라를 비롯한 7국을 평정하고 한반도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었으며, 진구황후 52년에는 백제의 사신이 칠지도(七枝刀)ㆍ칠자경(七子鏡)을 비롯한 각종 보물을 헌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기록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가 칠지도(七支刀)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주장은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가 되었다.

그러나 한국의 학자들은 칠지도(七支刀)를 <일본서기>에 나오는 칠지도(七枝刀)와 동일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근거는 없으며, 더욱이 <일본서기>의 기록 자체가 고대의 신화를 근거로 편찬된 것으로 신뢰도가 낮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장은 억지라고 비판한다. 또한 명문의 ‘공후왕(供侯王)’은 후왕(侯王)에게 제공(提供)ㆍ공급(供給)되었다는 뜻이므로 칠지도는 백제가 제작하여 제후왕(諸侯王)인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한편, 1935년 조선총독부 발굴단이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였던 부여 군수리(軍守里)의 절터에서 칠지도와 유사한 형태의 유물을 발견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 유물의 형태나 행방에 대해서는 현재 자세한 정보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서해안신문 이순례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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