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고운 최치원 선생 '추계제향'

고운 최치원 선생의 추계 제향이 12일 오전 서산시 지곡면 부성사에서 열렸다.

 

이날 (사)부성사 대표 박부무 유사, 종친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다.

 

추계제향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업적과 학문·유덕을 기리며 초헌관 이상목 시 문화관광과장, 아헌관 김종길 지곡농협조합장, 종헌관 김교성씨가 맡아 제향을 올렸다.

 

그 밖에도 유사들은 대추, 집례, 봉향, 봉로, 봉작, 전작, 직일, 알자, 향피 등 각자의 소임을 다하며 정성을 다해 제향에 임했다.

 

박부무 대표는 "이번 추계제향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고 선생의 가르침을 되새기는 자리"라면서 "앞으로 그 뜻을 후대에게 전통·계승하는 것이 우리들의 소임"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상목 문화관광과장은 "고운 최치원 선생의 뜻 깊은 제향에 초헌관을 맡게 되어 영광이다"라며 "그 분의 얼을 느끼면서 제향을 올리는 것이 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한편, 백과사전 자료에 따르면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은 신라 말기의 문신, 유학자, 문장가다.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고운, 해운, 해부다. 시호는 문창(文昌)이며 신라 삼최(三崔) 중 한 사람이다.

 

그는 6두품 출신으로서 12세의 나이로 당에 유학하여 6년 만에 당의 빈공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절도사 고병의 막하에서 《토황소격문》을 지어 당 전역에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고, 승무랑 시어사로서 희종 황제로부터 자금어대를 하사받았다.

 

귀국하여 헌강왕으로부터 중용되어 왕실이 후원한 불교 사찰 및 선종 승려의 비문을 짓고 외교 문서의 작성도 맡았으며, 시무 10여 조를 올려 아찬 관등을 받았다. 그러나 진골 귀족들이 득세하며 지방에서 도적들이 발호하는 현실 앞에서 자신의 이상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관직을 버리고 은거하여 행방불명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가야산의 해인사로 들어갔다고 하고, 민담에서는 지리산으로 들어갔다고도 한다. 908년까지 생존해 있었음은 확실하지만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귀국 직후 당에서 쓴 글을 모아 헌강왕에게 바쳤던 《계원필경》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개인 문집으로 꼽히며,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 《난랑비서(鸞郎碑序)》는 신라 화랑도의 사상적 기반을 말해주는 자료로서 주목받는다.

 

저서에는 계원필경 외 금체시, 상대사시중장(上大師侍中狀, 잡시부, 중산복궤집, 오언칠언금체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부석존자존, 법장화상전, 석이성전, 쌍녀분전기가 있다.

 

그는 현재 경주 최씨의 시조로 모셔지고 있다.

 

충남농어민신문 신정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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