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출을 준비하면서 옷장을 쓰윽 훑어봅니다. 생일날 친구가 사준 블라우스에 어떤 치마가 잘 어울릴까 고민하는데 주홍빛 스커트가 눈에 들어옵니다. 사계절 언제 입어도 기분이 산뜻해지는 이 스커트는 집에서도, 외출할 때도 편하게 즐겨 입고 사랑하는 옷 중에 하나입니다.

 

“스커트 색깔이 정말 곱다!”

 

“예쁘지잉. 나두 이 색깔을 보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산뜻해지고 좋아져.”

 

“앞에 하트, 하하하 너무 귀엽다!”

 

“요고, 비밀인데.. 보기 싫은 얼룩이 두어군데 지워지질 않아서 미싱 있는 동생한테 부탁해 하트를 박아 넣은 거여.”

 

“와우! 대박!”

 

“더 대박인 얘기 해줄까? 이 옷이 몇 년 됐는지 맞춰봐.”

 

“오래 된 거야? 새 것 같은데...”

 

“우리 큰아들이 지금 스물 한 살이니까 꼭 18년 됐네. 큰 녀석 세 살 때 등에 업고 동서랑 길 가다가 서산 부영아파트 앞에 리어커에서 3천원을 주고 샀지. 세월이 흘러도 색도 변하지 않고 디자인도 정말 맘에 들어서 비슷한 스커트가 있으면 하나 더 장만하려고 인터넷을 샅샅이 뒤져봐도 없어. 이 스커트는 입을 때 예뻐서 좋기도 하지만, 입을 때마다 큰아이를 등에 업고 다니던 그 시절이 새록새록 생각나면서 추억을 되살려줘서 못 입게 되지 않는 이상 평생 버릴 수 없을 것 같아.”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는지까지 기억해? 대박!”

 

친구 말대로 어디서 얼마를 주고 샀는지까지 기억이 날 만큼 그때 형편, 그때 마음가짐이 다 생각납니다. 결혼하고 직장생활에 지루함을 느껴 ‘이제 나도 육아에만 전념하고 싶다’는 소망으로 꿈의 직장을 내려놓은 순간, IMF가 터졌습니다. 그 해 큰아이가 태어났고, 새롭게 시작한 사업 자리 잡느라 그야말로 우리 가정은 한 푼이라도 아끼며 긴축재정에 들어가야 했습니다. 천원 한 장 지출할 때도 신중을 기했고, 메이커가 있는 옷가게는 그저 아이쇼핑 마저도 허세고 낭비라 여기며 근처에는 얼씬거리지도 않았습니다. 리어커에 널어놓고 값싸게 파는 스커트와 티셔츠를 입으면서도 그때는 새 옷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참 행복했습니다.

 

부엌 싱크대에 흠집 난 접시들이 여러 개 있습니다. 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 우리 동네로 그릇장사가 왔는데 어찌나 그릇이 예쁘던지 너 시집갈 때 줄라고 한 세트 사놨다.”

"내가 다 알아서 할건데 뭣하러? 우리 한꺼번에 대학 간다고 엄마 힘든거 뻔히 알구만."

"다른데서 애끼믄 되제."

시골에서 농사 지어 노모를 모시고 아들 딸 대학 가르치느라 어려운 살림에도, 당신도 여자니까 예쁜 그릇 사용하고 싶었을 텐데 선반 위에 고이 올려놓았다가 살림집에 넣어주시던 접시들. 메이커가 아니라서 살짝만 부딪혀도 흠집이 잘 나 자주 속상해지지만 흠집 났다고 냉큼 버릴 수 가 없습니다. 다른데서 아끼고 아껴 사 주신 접시는 내게 음식을 담는 접시 그 이상의 추억이고 사랑입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먹고 살만 하니 이제 값비싼 메이커 옷을 입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그닥 행복하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감사가 식어지고 자꾸만 잊혀져갑니다. 그럴 때마다 오랜 옷, 오래 된 낡은 접시를 보면서 날마다 교훈을 찾습니다. 내가 얼마나 더 많이 감사해야 하고, 얼마나 더 많이 감격해야 하고, 얼마나 더 많이 사랑하고 섬겨야 하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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