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지만 따사로운 햇살이 좋은 일요일 오후 세기의 명산 부춘산을 가족과 함께 오릅니다.

 

당진에서 서산으로 나와 예배를 마치고 저녁약속 시간까지 비어 있는 2시간 가량을 가장 합리적이고 즐겁게 보낼 방법을 모색한 끝에 전혀 계획에 없던 산책을 하기로 결정이 내려졌습니다.

 

치마 차림에 하이힐을 신고 오를 수 없으니까 가까운 지인 집에 들러 일명 츄리닝 바지 하나 대충 빌려 입고 마침 차에 있던 운동화를 신고 출발합니다.

 

내 운동화니까 발은 편한데, 벗고 신고 하는게 귀찮아서 도톰한 스타킹 위에 그냥 겹쳐입은 커다랗고 낡은 츄리닝 바지차림은 곧 몇발자국 오르지 않아 잘못된 결정을 했음을 직감합니다. 어기적 어기적 걷게 되고 덥고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작은 산이니까 대충 입고, 신고 오르면 되겠지 했는데 오산이었습니다.

 

다른때 같았으면 산을 오르면서 유난히 헐떡거리는 남편 보라는 듯이 저만치 앞서 가서는 ‘빨리 걸으라’, ‘체력이 그것밖에 안되느냐’, ‘그러니까 뱃살 관리를 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등등 궁시렁 궁시렁 채근할 판인데 역전이 되었습니다.

 

옷차림이 불편하니까 오르는 것도 불편하지만 이 어색한 옷차림에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떡하나 싶어 안들고 가도 될 코트를 들고 올라가 최대한 가리고 걷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수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서도 아는 사람 한번 만난적 없었는데 그날따라 딱 맞딱트립니다.

 

그분이야 아무 생각 없을수도 있는데, 괜시리 제발 저려 얼굴이 화끈거리고 도망치듯이 눈인사만 나누고 헤어집니다.

 

정겨워야 할 따사로운 햇살이 진땀나게 하는 웬수로 변하고, 다른 때 같았으면 낙엽이 이쁘기도 하다는 둥, 어쩌면 이렇게 공기가 좋냐는 둥, 행복해 죽겠다는 둥 주저리 주저리 주절댔을 것을, 준비 없이 오른 산은 그냥 빨리 되돌아 나오고 싶은 마음 뿐입니다. 다른 때 같았으면 한바퀴 주욱 돌아나와 기분 좋게 흐른 땀 닦아가며 벌컥 벌컥 냉수 한사발 들이키며 뿌듯했을 터인데 어기적 어기적 불편하니까 가다 쉬고를 반복하다가 갔던길 이내 되돌아 나오고 맙니다.

 

그렇게 계획 없이, 준비 없이 마구잡이로 산을 오르고 남은 것은 덮어놓고 이래 저래 몸도 마음도 힘들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지만 한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자기야, 오늘 산에 갈 시간이 될 줄 알았으면 아침에 준비해 나왔을텐데.... 후회막심. 우리 틈만 나면 부춘산 가니까 이제 항상 차에 운동복이랑 양말이랑 신발을 실어놔야겠다. 그랬으면 정말 기분 좋은 산책이 됐을텐데..아쉽다! 나 때문에 식구들 모두 제대로 운동도 안되고 미안하네.”

“앞으론 꼭 차에 싣고 다니라구.”

“예”

귀가한 저녁 늦둥이 녀석이 일기를 씁니다.

 

‘우리 엄마는 오늘 다른 사람의 바지를 입고 산을 오르더니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그러더니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사람은 항상 준비를 잘해야 한다고 나한테 잔소리를 했다. 준비를 안한 건 엄만데 내가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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