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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부강해야 할 이유 찾고 깨닫는 기회"
서해안신문사문화탐방단 - 아픈 역사 간직한 강화도를 찾아서
[1호] 2019년 04월 15일 (월) 10:27:20 전미해 기자 jmhshr@hanmail.net
   
 

서해안신문사문화탐방단원들을 실은 버스는 4월 12일 오전 8시 서산문화회관에서 출발하여 당진시민 및 학생들을 함께 태우고 조선 제2의 수도였던 강화도를 향했다.

 

창밖으로 봄기운이 완연하고, 유난히 높고도 푸른 하늘은 역사를 찾아 봄 소풍 떠나는 단원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대변해 주는 듯하다.

 

첫코스로 자연과 역사, 신화와 전설이 깃든 현존하는 최고의 사찰 전등사를 오른다. 전등사 동문을 향해 오르는 길목에서 마주한 큰 소나무는 전쟁의 아픔을 말해주듯 곳곳에 상처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태평양 전쟁 당시 무기의 연료로 송진을 채취하려 남은 상흔의 흔적들로 우리들에게 어두웠던 침묵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된 삼랑성을 만나고 전등사로 진입하는 특별한 문 동문을 들어서니 양헌수 장군의 승전비가 세워져 있다. 인천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된 양헌수승전비는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념하기 위해 1873년에 건립된 것이다.

 

전등사의 대표 건물인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앞마당에 문화관광해설사를 마주하고 앉았다. 해설사에 의하면, 대웅보전은 생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이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해진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 때문이라고 한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었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됐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그러나 야반도주한 사실을 알고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는데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해설사의 설명이 없었더라면 나부상 존재 조차도 알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뻔 했다는 생각이 든다.

 

해설사의 설명대로 이 나부상은 네 조각이 다른 모습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다. 도망간 여인이 잘못을 참회하고 세상을 올바르게 살아가라는 염원도 있고 조각상을 보는 우리도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을 본받았으면 하는 바램을 담지 않았을까 싶다.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한 보물 제179호 약사전을 만나고, 보물 제393호로 지정된 전등사 범종을 만나고, 목조석기여래삼불좌상(보물제1785호)과,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보물 제1786호), 묘법연화경목판(보물 제1908호)까지 둘러보고 내려오다 보면 전통차 한잔 홀짝이고 싶은 ‘죽림다원’을 만난다. 소박한 연못과 어우러져 아늑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는 찻집은 담소를 나누기 좋은 장소다.

 

점심식사시간. 이곳 강화도에서 처음 대한다는 사람들이 거반인 ‘밴댕이회무침’은 보들보들하니 입안에서 살살 녹아 걸쭉한 막걸리 한잔을 부른다.

 

그렇게 기분 좋게 든든해진 배를 저마다 통통 두들겨가며 방문한 강화역사박물관.

이곳은 상설전시실과 전통한옥실로 구성돼 있다. 선사시대부터 근현대까지 강화지역 출토유물을 중심으로 실물, 디오라마, 복제품, 영상 등 다양한 전시기법을 사용하여 전시하고 있었다.

 

로비에서 만난 해설사는 이곳에 기획 전시되고 있는 강화동종과 선두포축언시말비를 상세히 설명해 준다. 강화동종은 강화산성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던 종이다. 1688년에 만들어진 종은 금이 가서 소리가 고르지 못해 1711년에 깨진 종을 녹이고 재료를 더해 정족산성에서 다시 만들었다. 동종의 무게는 옛종 무게 2천2백근에 6천8백근을 더해 합이 9천근이다. 종이 얼마나 무거웠는 지 침입한 프랑스군이 약탈해 가려 했으나 배에 싣지 못해 갑곳리 토끼다리 근처에 놓고 돌아갔다고 한다.

 

선두포축언시말비는 선두포 제방공사과정을 기록하여 세운 것으로 공사에 참여한 사람들 이름까지 다 기록돼 있어 조선후기 축언의 구체적인 과정이나 개간의 범위를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금석문이라고 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2층 상설전시실에 오르니 고인돌의 땅 강화, 신나는 청동기시대 탐험, 강화의 열린 바닷길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돌아보고 내려온 1층 상설전시실에는 고려 강화, 조선 · 근대 강화, 삶과 민속품으로 구성돼 있다. 전통한옥실에서는 안방과 사랑방, 누마루의 구조로 이루어진 조선시대 한옥이 실물크기로 전시돼 있어 눈길을 끈다.

 

강화역사박물관과 길 하나 두고 건너편에 조성된 강화고인돌공원은 사적 137호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고인돌 유적을 만나볼 수 있다. 드넓은 잔디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싱그러운 자연 속에 내달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고유번호 18번 지석묘 앞에서 해설사를 만나 설명을 듣는다. 덮개돌의 긴축이 6.40m, 너비 5.23m, 높이2.45m 덮개돌 무게 53톤으로 500여명이 같이 작업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고 한다. 2000년 12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 고인돌은 흙으로 바닥을 수십 층 다진 뒤 받침돌을 좌우에 세우고 판석을 막아 무덤을 만들었으나 양쪽 막음돌이 없어진 상태여서 석실 내부가 마치 긴 통로처럼 보인다. 이 고인돌은 무덤의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와 일부 제단 기능을 했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마지막 코스로 고려궁지를 찾았다. 이곳에서 만난 해설사에 의하면,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 6월부터 개경으로 환도한 원종 11년(1270)까지 39년간 머물렀던 궁터다. 강화로 천도한 고려는 2년 후인 1234년 궁궐과 관아의 건축을 모두 마쳤다.

 

당시에는 행궁·이궁·가궐 등의 여러 궁궐과 정궁이 있었던 너른 터였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 고려궁터의 정확한 범위와 위치는 파악되지 않고 있다. 현재 고령궁터가 들어서 있는 땅의 규모는 2279평에 불과해 이렇게 좁은 곳에서 임금님과 궁궐의 대신들이 머물렀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현재 왼쪽 잔디밭 너머로 둘러쳐진 담장 밖의 너른 터가 모두 행궁터였다는 사실을 해설을 통해 알게 된다.

 

이곳에서 만나볼 수 있는 강화유수부이방청과 강화유수부 동헌 등은 조선 시대 강화유수부의 건물들로 고려궁과는 무관한 건물들이라는 안내문을 읽을 수 있었다.

 

왕실관계 기록보관소로 온갖 자료들이 보관돼 있던 외규장각은 병인양요 때 행궁과 함께 폐허가 됐다. 프랑스군은 귀중한 책들과 금은괴 등을 모두 약탈해 가고 남은 건물까지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강화행궁을 완전 폐허로 만들어 놓고서야 떠났다. 이후 1975년 박병선 박사에 의해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에서 외규장각 도서가 처음 발견된 후, 한국 정부는 이 도서들에 대한 반환을 추진해 왔다.

 

이후 1999년 한국과 프랑스 정부 간의 반환 협상이 시작됐고, 미테랑 전(前) 프랑스 대통령이 2001년까지 외규장각 고문서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지부진했다. 그러다가 2010년 3월 한국 정부는 약탈도서에 대한 영구대여 방식을 프랑스 정부에 공식 요청하였고, 이에 대해 11월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이 5년 단위 갱신의 대여방식으로 반환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2011년 4월부터 약탈해 간 294권의 조선왕실 의궤를 포함한 전체 297권의 외규장각 도서가 네차례에 걸쳐 돌아오게 되었다.

 

약탈당해 우리 것을 우리 것이라 당당히 말하지 못하고 대여방식이라니. 울화가 치밀어 오르면서도 나라가 힘이 있어야 하고 부강해야 할 이유를 함께 참여한 학생들과 찾고 깨닫는 기회가 된다.

 

아픈 역사지만 우리가 자꾸 찾고, 깊이 알아가야 할 이유다. /전미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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