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서영태 장편소설 <무서운 마을>


12월24일 오전7시 크리스마스이브 아침.
예수탄생을 축하하는 초대형 트리가 시청 앞 로터리에 세워져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다.
본격적인 겨울로 접어들면서 늦잠을 잔 태양이 저 멀리서 기지개를 켜고 있다. 새벽의 어둠이 다 걷히지 않은 시각, 성탄을 축하하는 현수막들이 시내 곳곳에 내걸렸다. 교차로에 설치된 현수막 게시대에는 노래방개업, 망년회, 장학금 전달식, 일일호프집 등 다채로운 주제로 각종 현수막들이 지나가는 사람의 눈을 현란하게 유혹한다. 그런데 크리스마스이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검은 바탕에 흰 글씨 현수막이 이날 새벽부터 내걸리기 시작했다.
「주간충남 불매운동에 동참합시다.」
뜬금없는 제목의 현수막은 재래시장 상인 일동명의로 게시되어 있다. 조합장과 간부들이 회의를 열어 <주간충남>과 전면전을 결심한 것이다. 재래시장 상인조합은 현수막 게시에서 끝나지 않고 크리스마스이브와는 어울리지 않게 <주간충남>불매서명운동까지 나선다. 이들은 터미널 앞, 시청 앞, 대규모 아파트 앞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조직적으로 서명운동에 나서고 있다. 또한 「재래시장상인들 다 죽이는 언론」이라는 제목 하에 터미널 이전 음모 꾸미는 <주간충남>을 몰아내자는 살벌한 문구까지 사용하며 전단지를 만들었다. 불매서명운동에 나선 상인들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며 동참을 호소한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시골도시 구석구석으로 퍼진다. 1라운드는 영농조합과의 한판대결이었다면 2라운드는 재래시장상인과의 대결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기습시위 정도로 끝나지 않고 모든 주민을 겨냥한 여론조성과 불매운동이라는 방법으로 전쟁을 걸어왔다. 지역신문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독자다. 신문을 읽어주는 독자가 사라진다면 신문을 발행해봐야 쓰레기에 불과하게 된다. 상인조합은 바로 이런 점을 노린 것이다. 장터에서 뼈가 굵은 상인들은 물건을 팔지 못하는 아픔이 가장 크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신문사도 마찬가지로 신문이라는 상품을 시장에 내놨는데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천덕꾸러기가 되는 것이 가장 두려운 것이다.
<주간충남>입장에서도 상인들이 항의집회를 계속한다고 하면 불법집회에 대하여 경찰에 신문할 수도 있지만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선 불매운동을 막을 마땅한 재제수단이 없다. 이 운동은 신문사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을 신속하게 조성한다는 의미에서도 <주간충남>의 문을 닫게 만들 수 있는 치명적인 방법이다.

수세에 몰린 <주간충남> 상근기자들은 어떻게 조치도 못하고 막막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있다. 시간은 오후 6시20분. 퇴근시간이 넘었지만 편집장 김재진과 상근기자들은 우두커니 앉아만 있다. 오늘이야말로 가족의 품으로 빨리 돌아가야만 할 크리스마스이브인데도 얼음장 같은 분위기만 느껴진다. 어떤 기자의 핸드폰 멜로디가 힘차게 울어대지만 험악한 분위기에 받을 생각도 못하고 재빠르게 끊어버린다. 그러나 이대로 앉아만 있다고 사태가 반전되는 것은 아니다. 김재진이 상근기자들에게 목소리를 높인다.
「자아. 이제 퇴근합시다. 크리스마스이브를 가족과 함께 보내세요. 메리크리스마스!」
눈치 보며 차마 퇴근을 못했던 사람들이 「메리크리스마스」를 외치며 재빠르게 현관문을 나선다. 잠시 후 사무실 내에 김재진 외에는 한 사람도 남지 않는다. 그는 오늘의 사태를 담담한 마음으로 곱씹어보고 있다. 해답은 나오지 않지만 한동안 그 생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
문득 김재진은 서인애 생각이 난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인데 꼭 그녀를 만나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부터 그녀가 전화했었던 게 이제야 생각난다. 오늘은 꼭 함께 보내자는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서인애의 목소리였다.
잠시 후 김재진은 서울 강남터미널을 향하는 마지막 버스에 간신히 몸을 싣는다. 두 시간 후 김재진이 서인애가 입원해있는 정형외과 병실로 들어선다. 일주일이 지나서 만난 두 사람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손을 맞잡는다.
순간적으로 서인애가 먼저 그의 몸을 꼭 안아준다. 이 순간 김재진은 그녀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서 열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슬픔에 가득 찬 여인이었고 절망 속에 어두운 그림자를 달고 다니던 여자였다. 지금은 그녀의 가슴에서 갓 피어오르고 있는 희망의 새싹이 환한 웃음을 머금고 김재진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의 마음에 들어오려고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김재진은 그녀를 꼭 안아주고 윤기 나는 머리카락과 함께 우아한 요정 같은 얼굴을 가슴 깊은 곳으로 끌어당긴다. 그리고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눈감은 그녀의 얼굴을 지그시 내려다본다.
두 사람은 더 이상의 언어가 필요 없음을 느낀다. 그저 이대로 안고, 안긴 행위 자체가 무수한 언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가장 위대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안아준다는 것이 이토록 좋은 기분을 갖게 만드는 묘약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남자와 여자가 이렇게 해서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도 알 게 된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두 사람에게는 잠이 올 리 없다. 손을 맞잡고 상대의 눈만 바라보고 있어도 백 마디 말로 할 수 없는 내면의 감각이 교차한다. 때로는 짓궂게 장난을 치는듯하다가 때로는 진지하게 사랑의 감정을 나누기도 하면서 밤을 하얗게 지새운 두 사람은 새벽녘이 되어서야 꼭 안고, 안긴 채 잠깐의 꿀잠에 빠져든다.

크리스마스 다음날에도 상인들의 <주간충남>불매운동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 3일간의 불매운동으로 이미 1천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을 했다. 그들은 앞으로 10만 명 서명을 목표로 계속 운동을 이어간다는 내부계획을 세워놓았다. 전체인구 15만 명 정도의 시골 도시에서 10만 명이 서명을 한다면 대부분의 주민들이 동참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결국 <주간충남>의 설 땅은 없어지는 것이다. 상인들은 전 주민을 <주간충남>반대파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가족들과 함께 보내고 출근한 <주간충남>상근기자들은 여전히 분위기가 어둡다. 어느 기자 한 명이 가져온 <주간서해>오늘자 신문 1면 톱기사에 「재래시장상인들 죽이는 신문」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내용은 <주간충남>이 쓸데없는 터미널 이전 여론을 전파하며 상인들의 생계를 어렵게 한다는 것. 상인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불매운동을 시작했다는 것. 시청에서도 전혀 무모한 여론을 전파하고 있다고 말한다는 것. 벌써 2천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는 것. 10만 명 서명까지 받아 낼 거라는 것이 주요내용이었다. 결국 <주간서해>가 시장상인들과 함께 또 한 번의 대대적인 협공을 시작했는데 얼마나 많은 신문을 발행했는지 시내 여기저기 길거리까지 바람에 날려 다니고 있다는 것이다.
<주간충남>인터넷 판에도 항의성 댓글이 수천 개가 달렸다. 대부분의 내용이 재래시장과 터미널 상권을 무너뜨리는 수작을 그만두고 주민들 앞에 사죄하라는 내용이었다. 올라온 글마다 감정이 담긴 막말을 쓰고 있었다.
「재래시장 조합장을 만나서 협상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진현미 사무국장이 침묵을 깨고 한마디 던지자 김재진이 입을 연다.
「그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요. 또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김재진의 물음에 누구하나 속 시원한 대답을 못한 채 침묵 속에 빠져들면서 1초1초가 너무 늦게 지나간다. 아침회의는 아무 결론도 못 내리고 끝나고 만다. 다들 답답한 마음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지만 해방구가 보이지 않는다. 누구하나 일손이 잡힐 리가 없다.

아침 회의가 끝나자마자 목발을 짚은 김재진과 이연준이 재래시장조합사무실 문을 연다. 안에서 장기를 두고 있던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빤히 쳐다본다.
「어떻게 오셨슈?」
「<주간충남>에서 조합장님을 만나 뵈러 왔습니다. 지금 안에 계십니까?」
「이놈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무서운 줄 모르고 들어와! 조합장님 뵙고 싶으면 다들 사직서 들고 와! 니들이 무슨 기자야!」
「그래도 한번만 뵙게 해주세요. 말씀드릴 기회는 주세요!」
두 사람은 상인들에게 욕만 얻어먹고 밖으로 밀려난다. 그리고 상인들은 매몰차게 문을 닫아버린다. 아예 대화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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