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6일 오후1시 재래시장 입구 순대국밥 집에 김재진과 이연준이 들어서더니 구석진 곳에 비어있는 탁자를 보고 앉는다.
이 가게는 대체적으로 누르스름한 분위기가 베여있는 허름한 곳이기는 했지만 순대국밥 하나만큼은 일품이라는 소문이 돌아서 점심시간에는 빈자리가 남아나질 않았다. 그런데 오늘 운 좋게도 구석진 곳 빈 탁자 하나를 발견했다. 이집에서는 메뉴를 시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키 작고 다부진 아줌마가 사람숫자만큼 순대국밥을 끓여온다. 물은 셀프서비스다.
두 사람이 순대국밥을 기다리고 있는 사이에 옆자리에 있는 50대 아저씨들이 막걸리 한잔씩 걸치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이번에 <주간충남>놈들에게 본 떼를 보여줘야혀! 상인들 망하라고 터미널 옮기라며 떠들고 다니는 놈들 아녀?」
「그 편집장눔이 제정신이 아닌 눔이라잔혀? 노총각 눔이 눈에 뵈는 게 없으니께 허튼 수작 하는 거라는디?」
「참고 있다간 우리 재래시장은 완전히 망하는 겨. 아예 신문사문을 닫게 해야 되는구먼. 싹을 잘라내야혀!」
아저씨들의 말들에선 날카로운 살기가 느껴진다. 순박한 시골도시 재래시장 상인들의 마음속에 이토록 분노가 쌓여 있는 줄 어느 누가 알겠는가. 그들의 분노는 서민들의 애환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아이 가르치고 가족을 먹여 살리자니 팍팍한 세상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게다. 먹고 산다는 것이 그렇게 녹녹치만은 않았을 것이다. 손님들에게 소박한 물건을 팔면서 당한 수모가 산더미처럼 가슴속에 쌓여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마음에 날카로운 칼을 품고 그 흉기를 지금은 <주간충남>이라는 적에게 휘두르고 있으리라.

김재진의 마음속은 천근만근 무거운 돌멩이를 메 달고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고 있다. 민심이라는 게 이토록 무서운 것인가.
10년 동안 서민들의 애환을 담는 보도가 계속 됐었고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신문에 담으려 애썼다. 3개월 전부터는 도시발전을 위해 터미널을 이전해야한다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획기사를 게재하기 시작했다. 재래시장도 함께 발전할 수 있도록 대책을 동시에 마련해야 한다는 언급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차가워진 민심은 막연한 불안심리만 부각되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고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선동꾼들에 의해 진실은 무참히 파묻히고 있다.

순대국밥 집을 나온 두 사람이 인도를 따라 걷고 있다. 저 앞쪽에서 간이 좌판을 펴놓고 서명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아줌마 3명이 보인다. 그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전단지를 나눠주고 <주간충남>불매운동 서명을 권유하고 있다. 그 옆에는 검은 천에 흰 글씨로 커다랗게 쓰여 진 대형현수막이 나부낀다. 두 사람이 다가가자 얼굴을 모르는 아줌마들이 전단지를 나눠주며 서명을 권유한다.
「우리들은 시장상인들인데요. 서명 좀 하시고 가세요.」
「터미널 이전해야 도시가 발전하고 상인들도 더 좋은 환경에서 장사 할 수 있지 않습니 까!」
「젊은 양반들이 뭘 몰라서 그류! 터미널 옮기면 상인들은 다 죽어유! 그렇게 되면 대형마트가 독점해서 물가만 올릴거구만유.」
아줌마들은 김재진의 말을 들으려고 하질 않는다. 논리적으로도 이성적으로도 따지려들지 않고 오직 조합장과 간부들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 같다. 막연한 불안 심리를 선동하는 지도자들의 생각이 그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 아무리 이치에 맞는 설명을 한다고 해도 귀를 막을 것이다.
김재진은 길을 걸으면서 엉뚱하게도 한국의 토론 문화를 생각한다. 공중파 방송에서는 심야 시간대를 이용하여 매주 토론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을 자주 보는 김재진은 한 가지 의문점을 갖고 있다.
양측에서 토론을 했다면 합의를 한다든지 결의를 한다든지 어떤 결론을 내야 생산적이며 발전적인 토론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토론프로그램은 그런 결론을 찾아볼 수 없다. 두 시간 내내 자기들의 주장만 되풀이하다가 끝까지 한마디씩 더 주장하다 끝나버린다. 상대방의 말을 듣거나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보다는 반대논리를 찾아내서 허점을 공격하려고만 한다. 한마디로 반대를 위한 반대의 말잔치로 막을 내린다.
김재진은 공중파 방송 토론프로그램이나 터미널 이전 반대 운동이나 똑같은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 모두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은 애초부터 거부한다. 남의 말을 먼저 들으라는 뜻에서 귀가 두 개고 입이 하나라고 했다던데 그들은 입이 두 개고 귀가 하나인 기형아 같다는 생각에까지 이른다. 이토록 터미널 이전 반대로 시작된 움직임이 <주간충남>불매운동으로 번져서 민심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성난 민심이라는 거대한 쓰나미에 <주간충남>은 한순간에 박살이 날지 모른다. 그렇다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쓰나미가 몰려 올 때까지 해변에 묶인 채로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거대한 재앙이 닥쳐올 걸 알면서도 꼼짝 못하는 처지에 김재진의 입이 바싹바싹 말라간다.

재래시장 상인조합에서 <주간충남>불매운동에 나선지 3일째 되는 오늘 연명부에 서명한 주민들은 2천여 명이 넘어서고 있다. 서명한 주민들은 터미널 이전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재래시장 영세 상인들을 보호해야한다는 동정론에 마음이 끌렸다. 갈수록 비대해진 대형마트의 기세에 눌려 한없이 초라해지는 재래시장에 무언가 빚진 자처럼 느껴지는 마음이었다. 내 가족이 직접적으로 시장에서 장사를 하지 않더라도 친인척 중에는 분명 재래시장을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지역사회의 인맥은 그렇게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더욱 영세 상인들의 외침을 귀담아 듣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힘을 받은 불매서명운동은 서명자들을 계속 불려나가고 있다. 그들의 공언처럼 10만 명 서명목표가 결코 허황되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이날 저녁7시 재래시장 상인조합 9명의 간부들은 시장에서 가까운 일식집에 모여든다. 외부와 격리된 방안에는 풍성하게 차려진 해산물들이 상을 가득 채우고 있고 모처럼 맛보는 회 맛에 간부들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섞어가면서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오늘도 서명운동을 이끄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다 우리 간부님들이 적극적으로 도 와주셔야 우리의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마음껏들 드십시오.」
이 조합장의 격려에 3일 동안 서명운동을 지원하느라 바쁜 나날을 보낸 간부들은 술 맛이 더 당기는 모양이다.
소주 한 박스가 게 눈 감추듯 사라진다. 어느 정도 취기가 돌자 눈치를 보던 이 조합장이 일어서서 하얀 봉투를 하나씩 돌린다. 봉투사이로 백만 원쯤 되어 보이는 현금이 살짝 보인다. 간부들은 그 봉투를 말없이 호주머니에 찔러 넣는다. 그리고는 누가 주는 건지, 총 얼마를 받았는지, 어떻게 배분했는지는 묻지 않는다. 이미 이 조합장이 취임한 5년 전부터 불문율이 되어버린 법칙이다. 그저 영세한 상인들은 공짜 돈이 들어오면 그것으로 만족했으며 마누라 몰래 비자금을 마련해서 기분이 좋았다. 이 조합장은 총 3천만 원의 활동비 지원을 받았지만 적어도 그 절반은 자신의 호주머니에 챙길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있었다.
자신이 아니면 누가 영세 상인들에게 비싼 일식집에서 술을 먹여주고 비자금까지 나눠준단 말인가. 자신이 줄을 잘선 덕분에 재래시장 시설이 개선되고 새로운 건물도 세워준다지 않는가. 이 조합장은 애써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조합장과 간부들의 저녁식사자리가 다 끝난 후 조합장실에서 이정수, 신미연이 이 조합장을 기다리고 있다가 악수를 나눈다.
「불매서명운동이 상당한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주간서해>1면 톱기사를 보고 흥분한 민심이 서명운동으로 이어지고 있어요. 이제 <주간충남>은 설자리를 잃어버릴 겁니다.」
이정수의 힘 있는 말을 듣고 이 조합장은 활짝 웃는다.
「이렇게 언론인들이 적극적으로 상인들 편을 들어주시는데 잘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주 기사를 잘 써주셔서 상인들은 감동했습니다. 꼭 10만 명 서명을 받아내서 <주간충남>을 완전히 몰아내야지요.」
세 사람은 쾌재를 부르고 있다. 이제 민심도 그들 편이다. 재래시장을 지켜야한다는 명분도 있다. 이대로만 밀어붙인다면 어느 누구도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이번에야 말로 영세 상인들의 힘을 지역사회에 무섭도록 보여주어야 한다. 세 사람의 목표는 같다. 그 목표를 이루는 날까지 연합작전을 펼칠 것이다.

이날 저녁 크리스마스 다음날의 재래시장은 모든 불이 다 꺼지고 가게 밖에 내놓은 물건들 뒤엔 파란 가림막이 덮여있다. 12월말의 쌀쌀한 북풍이 가게와 가게 사이를 지나 도로변으로 빠져 나가며 성난 민심의 찬 기운을 절실히 표현하는 것 같다. 쌀쌀하고 고요한 재래시장에서 오로지 한 곳, 조합사무실만 불을 밝힌 채 세 사람의 음모가 무르익고 있다. 내일은 더욱 힘차게 불매서명운동을 이끌어야 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충남인터넷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