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님을 맞이하는 강남제일가 사람들



[역사탐방특집] 최초로 성리학 전파한 鄭臣保(정신보) 선생을 찾아서



# 왕족의 후손 서산정씨대종회, 뿌리를 찾아 탐방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리학을 전파한 정신보 선생과 그의 아들 정인경 선생의 빛나는 업적을 답사하기위한 ‘중국 강남제일가 탐방단’이 지난 18일 인천공항에서 상해로 출발했다.

이 탐방단은 전국지역신문협회 서영태 대전충남회장,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 양렬공기념사업회 김형순 부회장 등 전문가그룹과 서산정씨대종회 전국 각지 회원들로 구성된 60여명이 넘는 대규모 인원이 참가했다.

이날 탐방단은 중국 浙江省(절강성) 浦江縣(포강현)에 위치한 강남제일가(의문정씨)에서 3천여 명에 달하는 의문정씨 종친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탐방단은 강남제일가에서 주최하는 공식적인 환영행사 및 전통행사에 참여한 후 역사적인 기록물을 보관하는 서고와 수 백 년 전 정취가 남아있는 마을을 탐방했다.

명의 홍무제(주원장)가 써준 현판이 걸려 있는 ‘강남제일가’는 중국국가중요문화재로 현재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 받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심의 중이라고 한다.

한편, 역사적인 기록과 족보에 의해 중국에 있는 의문정씨와 한국의 서산정씨가 공식적으로 한 집안이라는 조인식까지 했었다. 의문정씨는 당나라 때부터 중국 4대 명문족으로 이름을 날렸다.



# 성리학이 기존보다 50여년 앞서 우리나라에 전파

최근 학계에서는 정신보 선생의 업적이 소개되면서 성리학이 기존의 학설보다 50여년 앞선 1237년에 우리나라에 전파됐다는 이론이 점점 힘을 얻어가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지난해 11월30일 서산시문화회관에서 서산문화원 주관으로 '한국성리학의 기원과 정신보'라는 주제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서 새로운 학설이 제기된 후로 급격히 부상하고 있다.

이 심포지엄에서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최영성 교수는 “안향에 의해 1290년 전래된 주자학 보다 50여 년 전인 1237년 고려로 망명한 정신보 선생에 의해 성리학이 전파됐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었다.

이어 ‘남송 및 원대 성리학의 학풍과 정신보, 정인경의 出處’를 발표한 성균관대학교 이상성 교수는 “정신보의 가문조사를 통해 정신보가 남송시대 명문 포강정씨의 후손으로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고 언급했다.

이어 광운대학교 김인호 교수는 '정인경의 정치적 기반과 활동'에서 정인경이 활동한 당시인 몽고간섭기 당시 이러한 정치적 상황을 통해 몽고어, 중국어에 능한 정인경의 다양한 활동내용을 사료고증을 통해 발표했다. 

 새로운 학설을 주장하는 학자들에 의하면 정신보 선생이 고려에 망명했을 때 풍속이 불교를 숭상하였는데 선생이 성현의 학문 性理學(성리학)으로 후학를 가르침에 고려의 선비들이 처음으로 정명도 정이천 양선생의 글을 보았다고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성리학이 들어온 시초이다.

이는 고려문신 안향이 1289년 충령왕 15년, 최초로 주자학을 고려에 전래했다는 학설에 문제가 있음을 알려주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하다. 이때 안향은 儒學提擧(유학제거)가 되어 왕과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朱子全書(주자전서)를 필사해 돌아왔다.

안향은 유학을 크게 부흥시킨 것은 역사적으로 맞으나 최초로 고려에 주자학을 전래했다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 안향이 유학제거라는 벼슬을 했다는 사실은 이미 누구에게선가 주자학을 배웠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이고, 또한, 이미 유학이 고려에 정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 정신보 선생, 고려의 瑞州(서주) 看月島(간월도) 망명

중국의 南宋時代(남송시대), 서산정씨의 원조인 정인경 선생의 부친인 정신보 선생은 중국 浙江省(절강성) 金華府(금화부) 浦江縣(포강현)에 살고 있었고, 南宋(남송)의 조정에서 刑部 員外郞(형부원외랑)을 지냈으며, 절강성 지역에서 학문으로 이름난 性理學者(성리학자)였다.

정신보 선생의 선조는 원래 하남성의 鄭州(정주)에 토속제후(중국 춘추시대에 鄭나라의 후예)로 살았으나 송나라가 만주의 여진족이 세운 金나라에 쫓겨 절강성 항주로 남하하였는데, 이때 정신보 선생의 선조들은 절강성 금화부로 이주했다.

정신보 선생의 曾祖父(증조부)는 정응충이며 관직은 判將作監(판장작감)이었고, 祖父(조부)는 鄭儀(정의)이고, 관직은 儒林郞(유림랑) 검교(檢校) 군기감(軍器監)이었으며, 부친는 정수거이며 관직은 禮賓事(예빈사) 同正(동정)이었다.

부친인 정수거는 太子詹事(태자첨사) 崔守郞(최수랑)의 딸과 결혼하여 정신보 선생을 낳았다.

이때 南宋(남송)의 理宗(이종; 1224 -1240년 재위), 嘉熙年(가희년)부터 몽고가 대대적으로 침략하여 襄陽(양양), 淮蜀(회촉)등이 차례로 함락되고, 이에 이 지역의 王旻(왕민), 李佰英(이백영)등이 그 성곽과 창고를 불질러 태우고 몽고에 항복했다.

이 일대를 장악한 몽고가 각 지역을 침략 정복하고 난 뒤, 그 지역의 명망 높고 학문이 뛰어난 선비들을 뽑아 그 지역을 관할하게끔 하였는데, 원나라 태조는 楊惟中(양유중)을 시켜 문장이 뛰어나고 학문이 높은 선비를 구하고 모으고자 하였다.

마침, 원태조가 德安(덕안)을 함락시키고, 趙復(조복)이란 학문이 뛰어난 선비를 얻었으니, 趙復(조복)은 유학에 뛰어나 그 지역의 선비들이 江漢先生(강한선생)으로 불렀다. 元太祖(원태조)가 학문에 뛰어난 선비를 얻고 크게 좋아했으며 金華(금화)에 살던 員外郞(원외랑) 鄭臣保(정신보) 선생의 뛰어난 인품과 학문에 대해 듣고 姚樞(요추)로 하여금 그를 모시고 오라고 했다. 그리하여 요추가 여러 차례 정신보 선생을 찾아와, 江漢先生(강한선생) 趙復(조복)과 같이 元太祖(원태조)를 도와 함께 원나라 조정에서 일하고자 하였다.

이에 정신보 선생이 말하기를 “옛말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 하고, 열녀는 두 가장을 모시지 아니 한다 하였으니 차라리 죽을 지언정 오랑캐 조정에 臣下(신하)가 되기 싫다” 하였다. 姚樞(요추)가 이 말을 元太祖(원태조)에게 고하자 太祖(태조)가 그 절개를 아름답게 생각하여 더 이상 강요를 하지 않았다.

그 후, 1237년 절강성의 금화에 살던 정신보 선생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서 고려의 瑞州땅(지금의 서산) 看月島(간월도)로 망명하였다.

이어 辛亥(신해, 1251년) 大寺洞(대사동, 지금의 서산 석림동 남원마을)으로 이사하여 望雲臺(망운대)를 쌓아놓고 늘 고향 쪽을 바라보며 눈물 지우며 그리워했었다.

지금도 서산지역의 儒林(유림)에서는 매년 松谷書院(송곡서원)에서 그의 學文(학문)을 기리고 配享(배향)하고 있다.



전국지역신문협회 공동취재팀



▲ 강남제일가를 방문한 중국탐방단

▲ 상해 동방명주 앞에서 중국탐방단 모습



▲ 중국 정주 삼공상 앞에 선 탐방단

▲ 중국 정주 명인원 앞 탐방단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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