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21일- 관유(우)의 묘, 낙양의 용문석굴로


아침 일찍 일어나 용문석굴로 가는 도중 눈으로만 관유의 무덤을 보고, 용문 석굴로 향한다. 용문석굴 입구에서 전기차로 갈아타고 매표소에 내려 도보로 구경한다. 석굴이 수 없이 많이 있는데, 당나라 측천무후를 위한 불상이 가장 크고 화려하다. 그 외에 크고 작은용문석굴용문석불용문석굴 계단 석굴에 부처님을 조각한 것이 수 백 개는 족히 될 것 같다. 부처님 조각마다 사연이 없는 것이 없다. 자식이 황후인 어머님을 위해서 만든 부처님, 아들을 위해 만든 부처님 뿐 아니라, 신라시대 신라왕자 구화산이 99세까지 살다 돌아가서 썩지 않는 등신불이 되었다는 부처님도 계셨고, 신라인이 굴 2개를 더 파 만든 부처님도 있었다. 불교를 통해 무엇을 그리고 이루고자 한 것일까.

이천의 강을 따라 깎아지른 듯 절벽에 황제를 향한 과열된 충성심에 만들어진 결과가 바로 용문석굴이라고 하며, 1600년 전부터 무려 400년 동안이나 팠다고 한다. 빈양3동 부처님 굴을 파는데 40년이 걸렸다고 한다.

낙양에서는 예부터 인물이 많이 난다고 한다. 이천강을 건너 1.2km 내려오니 평소 좋아하는 시인 백거이묘가 강 언덕의 작은 산에 모셔져 있다. 자가 낙천이요, 하남성 사람이라. 772년-846년까지 살았으며, 75세로 삶을 마감하는 동안 그가 지은 작품 수가 3천840편이라고 하니 그와 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함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행이 평소 좋아하는 시인이라 백락천 시선집을 갖고 있었는데 중국 낙양에 와서 흠모하던 분의 무덤에 참배 할 수 있음은 여행 중 큰 보너스를 받은 것처럼 감개무량 하였다.

하지만 일정으로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숭산으로 옮겨간다. 숭산의 높이는 1512m. 케이블카로 1200m까지 설치가 되어 있다. 숭산은 유불선, 삼교가 다 있다고 한다. 당의 측천무후가 숭산에 와보고 더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하여 이것을 중국 표현으로 등봉이라고 한다고 한다. 달마스님이 이 산에서 공부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별것이 아닌데, 중국 사람들은 온갖 수식어를 붙여 하늘에서 보면 숭산이 두송이의 연꽃처럼 생겼다든지 화려한 수식어를 다 붙여 스스로 감탄하게 하는 것 같다. 합천 묘산에 있는 두무산도 해발 1100m로 모양이 흡사하다. 우리도 이와 같이 산에 생명을 불어넣고 문화를 만들어 우리 산을 아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숭산 케이블카로 등정을 마치고 소림사로 내려온다. 소림사는 1928년 화재로 소실되고 다시 중건하여 1980년 문을 열어 관광객을 맞이하고, 소림사라는 무술영화를 만들어(영화배우 이연걸) 공전의 히트를 쳐 세계에 알려졌다고 한다. 가만히 있는 절에 문화라는 옷을 입혀 생명을 불어 넣으니, 문화를 보기위해 관광객이 찾아오고 무술을 배우겠다고 찾아온다. 소림사 무술학교에 무술를 배우는 학생이 현재 5만명 이라니 참으로 놀랍다. 소림사 절 안으로 이리저리 구경을 하고 있는데 비석을 지고 있는 돌거북이 보인다. 이 거북의 머리와 코를 만지면 일이 잘 풀리고, 이빨을 만지면 재물이 는다고 하여 관광객이 얼마나 만졌는지 돌이 닳고 닳아 맨들맨들하고 돌계단도 결이 없이 닳아 있다. 이를 보니 찾아오는 관광객이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복을 준다는 거북소림사
특이한 것은 소림사 스님이 직접 절 안에서 부처님를 모시고 있는 곳에서 기념품을 직접 팔고 있었다. 절 안 여러 곳에서 그러한 모습이 보인다. 수행을 하고 참선을 해야 할 스님이 직접 물건을 팔고 상행위를 하는 것은 중국 사람의 경제에 대한 개념, 즉 돈을 벌어야 하는 간절함이 생활 속에 베여 있는 것 같다. ‘흑묘 백묘 가리지 않고 쥐만 잘 잡으면 된다’라는 등소평의 말처럼 돈을 잘 벌어 절 살림에 도움을 주자는 의식이 있는 것 같다.

4시에 무술 쇼가 있다하여 모두 그곳으로 향한다. 빽빽이 들어 찬 인파 사이를 뚫고 들어가 보았지만 자리가 없어 맨 앞줄 바닥에 앉아 보기로 했다. 불편하기는 해도 특석보다 더 가깝게 보였다. 30분 동안 짧은 시간이지만 내공과 기를 모아 펼쳐 보이는 모습이 행자의 수련 정도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밖으로 나와 주차장으로 오는 양쪽은 무술 연마장인데, 대형 운동장이 양쪽으로 몇 개나 되고, 한 그룹이 30~40명 되는 학생들이 여러 그룹을 지어 무술을 배우고 있었다. 사람도 많은 중국이지만 무술만 배우는 사람이 5만이라니…대단하였다.

가면서 황하강을 건너는데 황하의 총길이 5460km, 발원지 티벳에서 하남성을 가로질러 중원을 젖줄이 되어 흐른다. 중국 사람은 황하는 살아 있어 언제든지 범람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23번이나 범람하였다고 한다. 황하를 기준으로 북방과 남방을 구분하니 강의 영향이 크다. 황하다리 길이는 2km인데, 건기인 지금 황하의 폭은 800m로 마치 내륙안의 바다로 여겨진다. 황하는 중원의 젖줄기요, 생명수라 하나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어 물난리로 애를 많이 먹었다고 한다.

정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상해에 갔다. 잠자는 것만 남았으니 오늘이 실질적인 마지막 날이다. 황하를 건너 운대산으로 간다. 차창 밖은 밀밭이 양쪽으로 끝없이 펼쳐진다. 이곳을 중원이라 부른다 한다. 중국의 모든 역사가 중원에서 시작 되었을 정도니 평원에 풍부한 자원 덕이 아니었을까. 지금 중원은 소비의 거점 도시로, 하남성은 1억이 넘는 인구가 있다고 한다. 부동산 개발 지하자원 개발이 한참이다. 밀밭사이로 수로를 만들어 관수하고 있는 모습이 간간히 보인다. 삼국지에 관우의 무덤이 낙양에 있는 것을 보니, 이 중원을 두고 얼마나 많은 다툼이 있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운대산 협곡
운대산에 도착하여 가는 길이 험하다하여 집사람만 보내고, 나는 식당이 있는 마을에 내려 식당 주변 마을 상점 생활풍습을 알아보기로 하고 마을을 배회하며 마주치는 사람과 목례하며 슈퍼에 들어가서 독한 술과 맥주, 국화차를 사고 식당 앞 탁자에 앉아 일족과 목을 축이며, 운대산을 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위로하였다. 잠시 여유를 갖고 그곳의 시골 사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날씨가 황사로 인해 뿌옇고 바람까지 불어 기관지에 좋지 않은 것 같았다. 산에서 내려오는 일행들도 모두 이구동성 날씨 얘기다. 신기한 마을 모습 중 하나는 버스에서 이발사가 내려 즉석에서 이발영업을 개시하였다. 벽에 거울를 걸고 달랑 의자 하나, 그리고 당연한 일인 듯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발을 하였다. 이발 후 머리감는 일과 면도는 하지 않았다.

이제 공식적인 중국 여행의 막을 내리고 낙양에서 정주로 갔다. 정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2시간 날아 상해에 도착하여 1박하고 돌아오는 비행기는 오전 9시30분이라 하였다. 정주 공항에 도착하여 탑승시간을 기다리는데 아무 통고도 없이 2시간이나 지연 출발하였다. 공항에서는 아무런 안내가 없다. 이것이 지금의 중국의 실정인가. 경제도 문화도 국민수준도 한 단계 성숙되고 높아져야겠다.


# 23일- 중국에서의 입국심사

중국시간으로 오전 9시30분 비행기였기 때문에 오전 5시 기상하였다. 이 시간 호텔에서 아침식사가 제공되지 못하는 상황이라 빵과 물, 요구르트 정도의 간식이 요깃거리로 비닐봉지에 담겨져서 1인 1개씩 제공되었다. 이 60명분의 봉지가 호텔 1층 프론트에 쌓여 있었다. 일행이 60명인데 한사람도 빠짐없이 일찍 내려와 방 열쇠를 반납하고 차에 올랐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공항 가까이 숙소를 정해 조금이라도 더 쉴 수 있게 했으면 좋으련만 40분 이상 차를 타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기 전 가이드는 중국 우황청심환을 팔고 또 중국 농산물 구입 장소로 이동한다. 우리말 간판으로 농협이라 붙여져 있다. 우선 신뢰를 얻고자 했을까. 우르르 몰려간 일행은 너나 할 것 없이 함께 참깨 앞으로 달려가 너도 나도 한 꾸러미씩 산다. 무엇이 우리를 이다지도 호들갑을 떨게 만드는지. 한국에서는 중국 제품의 기능 및 품질이 저질이라고 비아냥거리며 홀대하면서 중국에서의 행동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모두가 열성적인 중국제품 매수자가 되고 마니 참으로 아이러니 하다.

차는 잠시 후 상해 공항으로 이동하여 입국 절차를 밟는다. 최종 입국 심사장에서 순서대로 이름을 체크한다며 한 줄로 세운다. 죽 늘어서서 표를 검사하고 수화물을 붙인다. 우리 일행은 82세의 고령의 시골 어른부터, 78세의 노부부, 76세의 부부, 대부분 70에 가까운 연세라 피곤함이 심할 것 같다.
5박 6일의 외국 여행은 새로운 세상을 보고 새로운 경험이 되기도 하였지만 사람을 지치게 하는데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밤11시까지 쉬지 않고 강행군을 하니 지칠 수밖에 없었다. 차를 타면 2시간 정도는 기본이요, 중간에 화장실도 마땅한 곳이 없어 때로는 생리현상도 참아야했기에 여행이 즐겁고 편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피로를 느낄 새도 없이 그나마도 그중에서 가장 젊은 내가 누가 빠졌는지 확인하여야 했다. 일일이 한 사람 한 사람 확인하고 있는 순간, 연세가 많은 어르신이 땀이 송송 맺혀 달려오면서 공항에서 할머니를 잃어 버렸다고 하였다. 얼굴은 상기되었고 일행 60명 중 우리 소그룹 16명도 서로 마주보는 눈빛이 걱정스러웠다.
이미 가이드는 공항 입국심사를 마치고 수고했다며 인사하고 헤어진 상태고 중국 출국장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데, 그 중에 그나마 젊은 사람과 우리 집사람, 그리고 할머니의 남편이 공항 안으로 찾아 나섰다. 하지만 상해는 넓은 국제공항이다. 어디가 어딘지도 잘 모르고 도움을 청하고 싶다 해도 말도 잘 통하지 않는다. 결국 할머니를 찾지도 못하고 집사람이 돌아온다. 마침 가이드의 전화번호를 메모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게 하였으나 통화가 되지 않는다고 한다. 집사람이 다시 공항으로 찾아 나섰다. 마침 차를 타러 가고 있는 가이드를 발견하여 되돌아가 같이 할머니를 찾아 입국 수속을 밟았다. 모두가 놀라고 긴장하였으나 안도하는 마음이다.

모두가 입국 절차를 밟고 보안 검색대를 통과하는데 이번에는 나에게 문제가 발생하였다. 기계의 경고음이 울리고 검색대 직원은 나를 따로 불러 몸수색을 했다. 나는 군 생활 중 사고로 왼쪽 다리가 불편하여 보조기를 차고 있다. 과거에도 공항 검색 때 통과 시 문제가 있어 신경 쓰고 있는데 아니나 다를까 우려가 나타났다. 나를 사무실로 따로 불러 공안이 몸수색을 다시 하자는 제스처를 취하였다. 내가 우리나라 말로도 이야기를 하고 중국말로 보조기를 차고 있다고 했으나 그래도 몸수색을 다시하자는 제스처를 했다. 몇 개 단어의 중국어, 영어, 한국어로 말을 해도 중국 공안은 " I don't understand" 한마디로 일축하였다. 비행기 이륙시간은 다 되어가고 우리 일행 중 종친 형님은 내가 공안과 같이 갔는데 오지 않으니 걱정이 되어 사무실로 찾아왔다. 나는 중국 공안이 당황스럽고 또 수모로까지 여겨졌다. 더욱이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얼굴이 울그락푸르락 하며 내 말을 이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비행시간은 임박하고 말도 통하지 않아 결국 하는 수 없이 x-ray 투과기를 통과하는 과정의 검사를 받고 나오는데 착찹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누구나 자기의 치부를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듯이 나 역시 신체 일부의 불편한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동방항공이라고 붉은색으로 적혀 있는 비행기 기내로 들어와 자리를 찾는데 그래도 다행은 중국 올 때도 맨 뒤 끝 좌석인데 이번에는 중간에서 약간 앞좌석이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는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좀 전만 해도 흥분되고 상기된 마음이었는데 이나마도 위로가 되고 다행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나의 옆자리 사람과 인사를 나누니 한국에서 중국 상해에 공장을 지어 동파이프 연결 장치를 만드는 직원이라고 한다. 중국인 종업원이 100명이 넘는다고 하니 상당히 큰 회사라는 짐작이 들었다.

나는 이 젊은 친구에게 공항에서 출국할 때 검색대에서 있었던 일련의 과정을 얘기하며 자네가 중국에서 생활하고 있으니 방금 전에 있었던 나의 과정을 개선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아 장애인의 무리한 검색을 받지 않도록 공항이나 당국에 말을 해줄 수 있으며 좋겠다고 부탁을 해 보았다. 그랬더니 그 친구 대답인즉 그것은 말해보아야 안 된다, 저희들 방식대로 하여다 한다, 자기가 아는 중국 사람들은 다 이렇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말이라고 일축하고 말았다. 하소연을 부탁한 내 쪽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둘 사이의 침묵이 흐르고 옆에 있는 집사람이 위로를 하며 너무 마음 상하게 생각 말라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집사람도 얼굴 모습은 상기되어 있었다. 왜 그런가 했더니 집사람도 내가 오지 않아 물어보았는데 사람들이 공안에 갔다하여 나를 찾아 공안 사무실로 찾아오고 있는 사이에 나는 x-ray 투과기를 통과하는 과정의 검사를 겪고 있던 것이었다. 집사람도 어이가 없고 화가 났던 모양이었다.

일련의 과정이 너무 많이 상처가 되어 몇 자 더 적어본다. 신체장애자가 무기 소지, 마약 밀반출 및 테러를 할 가능성이 일반 건강한 사람보다 극히 낮다고 본다. 왜냐하면 자기 한 몸도 가누기 힘든데, 테러는 말도 안 된다. 불법무기나 마약소지도 먼 여정에 몸이 부자유스러워 혼자 걷기도 힘들어 눈썹조차 빼놓고 걷고 싶은 심정인데 무엇을 더 몸에 붙이고 다니고 싶겠는가. 중국 공항보안 요원도 장애인의 인권을 보호하면서도 완전한 검색이 될 수 있도록 하기위해서 좀 더 명확한 국제적인 지침이 있으면 좋겠다. 내가 모든 장애인을 대표해서 부당함을 호소할 수 없지만 모든 장애인이 인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복잡 다양한 세상이다. 오늘 건강한 사람도 예측할 수 없는 사고, 아무리 삼가도 피하지 못하는 사고가 수없이 일어날 수 있지 않은가. 모든 곳에서 편견이 없기를 바란다. 내 마음 격정에 이 일의 이야기가 길어졌다.

다시 비행기 이륙을 위한 굉음의 소리가 들리고 엔진의 높은 소리에 비행기는 상해 활주로를 미끄러지듯 이륙하여 어느새 멀리 아래에 상해가 보인다. 너무 빡빡한 여정, 저렴한 여행수가에 비해 긴 여행이었을까. 피로에 지쳐 빨리 집으로 가고 싶었다. 비행기 승무원들이 기내를 돌며 불편한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있는데, 옆에 젊은이에게 한국 승무원이 있는지 물으니 있다고 한다. 누구냐고 물으니 한국말로 인사하는 사람이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참 쉬운 말이다. 나는 그것을 왜 몰랐을까. 중국 비행기 승무원은 모두 중국인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마치 승무원이 오기에 한국 승무원임을 확인하고 내가 겪은 일련의 입국수속과정을 얘기하고 공항당국에 이야기해달라고 하니 내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자기가 근무하는 항공사에 이 일을 보고하겠다고 하였다. 내 이야기를 들어주니 한편으로는 마음이 위로가 되는 것 같았다.

비행기가 어느 정도 고도에 이르니 기내식이 나온다. 마지막으로 받는 중국 식사다. 아침밥도 먹지 못하여서 시장한 김에 한 그릇을 비운다. 중국 음식 특유의 향이 진하지 않아 그런대로 먹을 만 했다. 어느새 비행기 창밖으로 부산의 해안선이 보이며 잠시 후에는 착륙하니 안전벨트를 매라는 기내 안내방송이 나왔다. 비행기가 바다 쪽에서 육지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향해 안전하게 착륙을 하니 비로소 안도의 마음으로 긴장이 풀렸지만 피곤함은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합천에서 온 일행은 봉고차를 빌려 가기로 했다. 타고 온 기사(사형)에게 전화를 하니 시간에 맞추어 와서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일행의 수화물을 찾아 먼저 나온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가축을 기르고 있는 사람은 소독을 하고 나와야 된다고 한다. 그래서 한참을 그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기다려도 나오지 않아 들어가 보니 사람이 없었다. 우리는 1, 2번 게이트에서 기다리는데, 그 사람은 3번 게이트로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는 곳이 여러 곳이라 벌어진 일이다. 작은 일이라도 꼬이기 시작하면 엉클어지기 쉬우니, 말이 통하는 우리끼리도 의사전달이 정확치 않아 서로를 찾는 해프닝이 일어났다. 기다리는 봉고차를 타고 긴 여정의 중국 여행길을 마치며 오는 길에 점심을 먹고 가자고 제안하였다. 하지만 집을 비운지 6일이 되어 마음이 바쁘다하여 사양을 한다. 점심은 먹지 않고, 그리운 집이 있는 합천으로 달려와 가야, 야로, 야로 소재지에 차례로 하차를 하며 그동안 고생했다고 인사로 마무리를 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운전한 기사도 점심을 먹지 못하여 시장하였고 나도 시장기가 돌고 하여 우리 면에 있는 식당에서 기사와 우리 부부는 함께 늦은 점심을 저녁으로 겸해 셋이서 소주 한잔으로 마지막 회포를 푼다. 마침 아들이 대구에서 집으로 오고 있는데 10분 정도 걸려 도착한다고 한다. 기사와 소주잔을 기울이니 오늘따라 소주가 달다. 여행의 긴장도 풀어지니 마음도 녹녹해진다. 평소 절친한 관계의 기사가 약 먹는다고 소주잔을 기울이지 않고, 아들 녀석이 술 많이 드시지 말라는 잔소리까지 하였지만 그래도 나는 소주 한 병을 깨끗이 비우며 아들 차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비로소 장도의 긴 여행이 막을 내린다.


# 에필로그

상해 정주 시내의 복잡한 12차선 교차로에서 무수히 많은 차들이 경적을 울리면서 지나간다. 아슬아슬한 것만큼 위험도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불법 U턴을 해도, 불법 좌우 회전을 해도 조금 기다렸다 가면 된다는 마음으로 느긋하게 기다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는다. 자신도 위험을 피하여 운전을 하고 상대의 잘못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운행을 한다. 이것이 대륙성 기질인가, 이런 것들을 여유라고 이해하여야 하나. 그러나 내가 볼 때는 답답하다.

100년이 시차 없이 움직이는 나라, 또 언 듯 봐서는 좋지도 않은데 그곳에 영혼을 불어넣어 생명을 불어넣어 문화를 만들고 상품화를 시키어 만들어진 스토리에 관광객들은 감동을 한다. 몇 번을 가보았지만 알 수 없는 곳이 중국이다. 옛부터 문화와 역사가 많이 교류 되어서 오늘날 더욱 교류를 활발히 하여 한국과 중국 서로가 ‘윈윈’하는 상생의 관계로 발전되기를 간곡히 바란다.

끝으로 이번 종친회에 수고하신 대종회 부회장님, 창환 회장님, 전 종친회 정승 회장님께 거듭 감사드린다. 종친회의 보배 같은 분이 작고하시거나 연세가 많은 분들이 늘어 행사진행이 어려워지고 있다. 젊은이의 많은 참여가 필요하며 평소 생업에 열중하시고 일 년에 한 두 번은 동참해주길 바란다. 끝


서산정씨 합천총무 정갑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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