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획시리즈] 호산록(湖山錄) - 조선 초 서산지역 사회·경제를 말하다 [1편]

 

『호산록(湖山錄)』은 1619년 서산의 사족[문벌이 높은 집안]인 한경춘·한여현 부자(父子)가 편찬한 사찬 읍지로, 1600년대 이전 서산 지역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조선 초기 사찬 읍지가 흔치 않은 가운데 특히 충청남도 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찬 읍지라는 점에서 매우 가치 있는 자료이며, 그 내용이 매우 상세하여 당대의 사회상을 재현할 수 있다. 본지는 기획시리즈를 마련하여 호산록을 통해 조선 초 서산지역 역사와 생활상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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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록』은 1582년 서산에 수령으로 부임했던 고경명(高敬命)의 제안에 따라 제작되어 건(乾)·곤(坤) 2책으로 구성되었으며, 총 45항목의 다양한 주제로 1500년대부터 1600년대 초반까지의 서산 지역 사회상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국내에 현전하는 16~17세기 사찬 읍지는 주로 경상도 지역에 많이 남아 있고 충청도는 『공산지(公山誌)』, 『홍산현지(鴻山縣誌)』, 『충원지(忠原志)』, 『홍양지(洪陽志)』, 『호산록』 등 5종이 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호산록』을 제외한 4종은 현전하지 않는다.

『호산록』은 당시 각 지역에서 사족들에 의하여 편찬되었던 사찬 읍지의 기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향촌민에 대한 교화, 고을의 수령에 대한 경계, 가문 현양, 양란 직후의 사회 질서 안정 등을 목적으로 편찬된 것이었다.

『호산록』의 첫머리에는 편찬 의도를 나타낸 ‘호산록서(湖山錄序)’, ‘호산록목록(湖山錄目錄)’, ‘호산록의례고상(湖山錄依例考詳)’이라는 항목이 있다. 여기에는 편찬 동기와 과정, 저술 목적 등 개인적인 입장 표명과 함께 저술의 기본 방향, 주요 항목의 설정 이유 및 준례 등이 기록되어 있다. 항목 구성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체제를 근간으로 하되 더욱 세분화되고 지역적인 면이 부각되었다. 제1책에 36개의 항목을 두어 서산의 행정, 사회, 경제 등의 지역상을 매우 상세히 기록하고 제2책은 서산의 인물을 8개 항목으로 분류해 서술하였다.

각 항목 중 행정·경제·재정과 관계되는 항목은 둔전(屯田), 국가 둔전, 장시(場市), 해포(海浦), 해산(海産), 해호(海戶), 자염(煮鹽) 등이다. 이들 항목에는 각각의 위치와 이곳을 이용하는 백성들의 어려움이 잘 나타나 있고, 임진왜란 이후의 변화상이 보인다.

사회·인물·예속 관련 항목은 공자 세가(孔子世家), 묘사(廟祀), 민속(民俗), 향풍(鄕風), 향서당(鄕序堂), 유람(遊覽), 고금 토주(古今土主), 우거(寓居), 향소 청근(鄕所淸謹), 하리 청근(下吏淸謹) 등이다. 이 항목은 당대 서산에 거주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단면을 보여준다. 서산에 부임했던 관리들을 비롯해 재지 사족, 하급 관리 및 승려, 신분적으로 하층민에 속했던 이들까지 등장한다.

이와 같이 사회·인물·예속 관계에 비중이 두어진 것은 『호산록』에 재지 사족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음을 나타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중에도 향촌민의 생활과 어려움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당시 어지러운 향풍, 관리들의 부정, 국방의 허술함 등 16세기 서산 지역의 실상을 개탄하는 것이 주요 내용으로 다루어져 있다.

『호산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성씨와 인물 기록은 다양한 계층을 다루고 있지만, 역시 양반 사족의 기록이 많다. 관찬 읍지에서 단편적으로 보이는 성씨 기록과 비교하면 『호산록』에서는 각 성씨별 관련 인물이 등장한다. 어디에서 누구의 자제로 태어나 어떤 활동을 하였는지, 그 집안 족보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는 기록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 이미 없어져버린 성씨를 고증하고 있기도 하다.

서산에서 고려 이래로 토착적 지배력을 가진 대표적인 성씨는 서산 정씨와 서산 유씨였다. 이들은 고려 말 원 지배 하에서 성장하여 지방의 토호적 성격을 지니면서 상당한 세력을 가졌다. 서산 정씨는 정인경(鄭仁卿)을 성황신으로 모실 정도로 위세가 있었지만, 『호산록』에 자손들이 등재되지 않을 만큼 쇠락하였다. 서산 유씨 일부는 향리층으로, 또 일부는 양반 사족으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송씨와 문씨는 사족화하여 향촌 활동에 참여하지만, 그 세력은 미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찬자인 한여현은 고려 조 가장 훌륭한 성씨로 안(安), 정(鄭), 유(柳)를 꼽으면서, 이미 한미해졌다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보면 1600년대 초 이미 토착 세력과 이거 사족 간에 세력 교체가 이루어진 듯하다. 『호산록』의 고금 인물 항목에서도 새롭게 입향한 전주 이씨가 가장 많이 수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서산 유씨가 9명이고, 청주 한씨가 8명, 그리고 조(趙), 김(金), 안(安), 원(元)씨 등이 3~4명 올라 있고, 강(姜), 정(鄭), 최(崔), 황(黃) 씨도 2명씩, 곽(郭), 문(文), 박(朴), 송(宋), 신(申), 임(任)씨가 1명씩 올라 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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