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탐방시리즈] 서산시 지곡면 - 충청남도문화재자료 제199호 <부성사>

 

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고운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는 춘계 제향이 지난 11일 서산시 지곡면 부성사에서 열려 정대영 지곡면장, 관계자 등 60여 명이 참석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부성군(현재의 서산) 등지의 태수를 지냈으며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전환기에 살았던 대표적 지식인이다.

조선 선조 때 최치원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는 유림들이 ‘도충’이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고, 흥선대원군 때 훼손되었다가 순종 1년(1907)에 새 단장하였고, 1913년 당시 서산군수가 태수로 지냈던 곳의 명칭을 따라 ‘부성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외삼문, 내삼문, 동재, 서재 등의 부속 건물이 있고 그가 직접 쓴 ´과선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지곡면 산성리 부성산 남쪽에 건립된 부성사는 통일신라 말 진성여왕 7년(893)에 고운 최치원이 당시 부성군(현재의 서산) 태수를 역임한 연유로 조선 선조 때에 선생의 덕망과 학문을 따르던 지방 유림들이 부성산성 내에 사우를 건립하고 영정과 위패를 봉안하였다.

 

= 새로운 정치·사회질서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

최치원의 자(字)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또는 해부(海夫)이다. 고려 현종(顯宗) 때인 1023년(현종 14년)에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되었으며, 문묘(文廟)에 배향되며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諡號)를 받았다. 신라 6부의 하나인 ‘사량부(沙梁部, 지금의 경주)’에서 6두품의 신분으로 태어났으며, 오늘날 경주(慶州) 최씨의 시조로 여겨지고 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12세 때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879년 황소의 난 당시 이를 비난하는 <토황소격문>을 지으면서 문장가로 유명해졌다. 승무랑시어사내공봉(承務郎侍御史供奉)을 지냈으며, 귀국 후 〈시무십조 時務十條〉를 올려 아찬(阿飡)이 되었다.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 중에는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가 송악(松岳)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은거하고 있던 해인사에는 희랑(希朗)과 관혜(觀惠) 등 두 사람의 화엄종장(華嚴宗匠)이 있어서 서로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며 대립하고 있었다. 즉, 희랑은 왕건을 지지한 반면, 관혜는 견훤(甄萱)의 지지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 때에 최치원이 희랑과 교분을 가지고 그를 위해 시 6수를 지어준 것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로 보아 최치원은 희랑을 통해서도 왕건의 소식을 듣고 있었고, 나아가 고려의 흥기에 기대를 걸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의 중심무대가 경주에서 송악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은거생활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문인(門人)들이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해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진행/ 서부본부 이순례 사무국장

취재/ 임보영 주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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