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탐방시리즈]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 칠지도 도장공 추모문화제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에는 야철터가 있다. 조선시대 이 마을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철 생산 혹은 은 제련(製鍊) 양상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조선 초기 명(明)으로의 조공(朝貢)에 필요한 금은(金銀)이 매우 절실하였던 상황에서 서산지역이 은 산지(産地) 중 하나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서 제8회 칠지도 도장공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칠지도기념사업회·지곡면주민자치위원회 주관, 서산시·서산시의회 후원으로 지난 14일 지곡면 도성3리 마을회관 광장에서 개막했다.

문화제에는 성일종 국회의원, 정대영 면장을 비롯한 칠지도기념사업회 관계자, 마을주민 등 150여 명이 참여하여 성황리에 치러졌다.

이날 칠지도 도장공 마을의 역사적 가치를 널리 알리는데 공로한 분들의 표창으로 ▲성일종 국회의원 표창에는 이일형, 김옥선, 박종옥 씨가 받았고, ▲우종재 시의장 표창에는 최화묵, 천경호, 김순난 씨가 받았다.

칠지도기념사업회 박병석 회장은 “화창한 봄날 칠지도 도장공 추모 문화제를 찾아주신 내빈 여러분께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며 “칠지도 문화제는 우리 서산시의 자랑이며, 마을자체로 칠지도 도장공 추모를 위해 시작한지 벌써 8회째를 맞이하여 감회가 새롭고, 앞으로 지역민의 단합으로 지역문화 보존·계승·발전에 함께 참여해 주시길 당부 드린다.”고 말했다.

이어서 성일종 국회의원은 “칠지도 도장공 추모문화제라는 우리지역의 문화유산이 있다는 것은 큰 자랑이며 자부심이다.”라면서 “백제문화의 중심이었고, 그곳이 우리 자랑스러운 도성리이며, 우리 모두가 역사성을 잘 보존하여 새로운 문화의 큰 흐름의 줄기가 될 수 있도록 힘을 합쳐서 역사가 있는 도성리로 좋은 유적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말하였으며 초헌관으로 나서 추모제를 주관하였다.

특히, 탄곡 이은우 선생이 행사에 참석해서 백제문화와 칠지도, 도장공에 대하여 설명했다.

 

= 백제시대 칠지도란 무엇인가

‘칠지도’(七支刀)는 현행 국사교과서에 백제의 뛰어난 제철 및 상감기술은 물론 백제와 왜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로 소개되어 있다.

칠지도는 일곱 개의 가지가 있는 칼이란 뜻으로 칼 앞면에 새겨진 ‘七支刀(칠지도)’란 글자가 그대로 유물 이름이 되었다. 칼에 새겨진 내용의 골자는 태화 4년, 백제 왕세자가 왜왕을 위해 만들었으며, 신비한 영험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칠지도는 하늘과의 교감을 나타내는 ‘칠성’(七星) 혹은 불교적인 의미의 ‘칠각지’(七覺支)로 해석되기도 한다.

1874년 일본 나라현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의 한 창고에서 이 칼이 발견될 당시 신궁의 유물목록에는 ‘육차모'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한다. 1892년 ‘칠지도고’(七枝刀考)라는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支’를 ‘枝’로 바꾼 것은 다분히 ‘일본서기’의 252년, 백제가 칠지도(七枝刀)를 헌상(獻上)하였다는 기록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렇지만 3세기 중엽 일본에서 한반도 남부를 정벌하였다는 내용의 위 기록은 2차대전 후 일본학자들 사이에서도 부정되고 있다. 이에 대한 수정론은 칠지도 제작연대를 중국 동진(東晋) 태화(太和) 4년(369)으로 보는 것인데, 이 또한 4세기 중엽 가야지역을 평정하고 이 지역을 200년가량이나 통치하였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에 기반을 두고 있다.

즉, 19세기 말에 발견된 칠지도는 그동안 일제의 식민사관을 뒷받침하는 도구로 이용되어 왔던 것이다. 1960년대부터 남북의 학계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한 연구를 꾸준히 진행하였으며, 4세기 후반 근초고왕대(近肖古王代)의 하사설(下賜說)을 비롯하여, 5세기 제작설, 6세기 제작설 등 무척 다양한 견해가 나오고 있다. 다만 그동안의 연구가 명문해독, 특히 제작연대에 치우치다 보니 칠지도의 성격에 대한 이해 또한 ‘하사설’과 ‘헌상설’의 이분법에 수렴되는 경향이 있다.

 

= 지곡면 도성리 쇠팽이에 있는 야철 터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충청도(忠淸道) 해미현(海美縣) 호장(戶長) 김연(金鍊)이 서산군(瑞山郡) 임내(任內) 지곡현(地谷縣) 땅에 은돌[銀石]이 있다고 하니, 관가에서 사람을 보내어 파내어서 납[鉛] 1근 8냥쭝[兩重]을 녹이었는데, 정련(精練)한 백은(白銀)이 1전 3푼이었다. 또 다른 도(道)는 은돌이 있는 곳이 모두 암석 사이인데, 여기는 땅이 평평하고 나무가 무성하여 은(銀)을 단련하기에 제일 좋은 땅이었다. 공조(工曹)에서 아뢰기를, ‘원컨대, 김연을 교명에 의하여 역사를 면제하여 후인을 권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태종 17년, 11월 7일)”라는 기록이 확인된다.

이후에도 은이 채굴되어 활용되는 등 서산 지역은 은(銀) 산지로 알려졌고, 일제 강점기에도 은부리 지역에서 은광 산업이 성업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또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서산군의 서쪽 도비산(都飛山) 남쪽에 철장(鐵場)이 1개소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비록 도성리 야철 터와 관련된 기록은 확인되지 않으나, 도비산이 도성리로부터 불과 20㎞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지곡면 일대가 예부터 철 생산지로 유명하였던 점을 감안하면, 도성리 야철터 또한 서산 지역에서 토산 철을 생산한 지역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서산시의 서북단 지곡면 도성리 일대에서 야철터가 확인된다.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는 지곡면 중에서도 가장 서북단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높이 70m 이하의 낮은 구릉성 산지가 가로림만과 맞닿아 있는데, 이 구릉성 산지를 중심으로 주변에 마을들이 펼쳐져 있다. 특히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쇠풍리골[쇠팽이]과 음불이골[은부리]은 남북 방향의 낮은 고개를 중심으로 좌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 주변을 중심으로 철 슬래그편들이 다량으로 확인되고 있다.

도성리 야철 터는 아직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사례가 없으며, 『문화유적분포지도』에 간략한 정황이 서술되어 있고, 주민들의 전언에 따르면 은부리마을에서 최근까지 철광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하여,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일대가 철 생산지 혹은 철 수공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지역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서산시 지곡면 도성리 마을 입구 마을 회관에는 2010년에 세워진 칠지도제작야철지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도성리 야철 터가 백제 왕이 369년에 일본 왕을 위해 만든 칠지도(七支刀)의 제작지라는 전언에 따라 지역 주민들이 건립한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도성리 야철 터가 백제 시대 이후의 유적임을 입증할 만한 학술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정확한 양상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진행/서부본부 박한영 부단장

취재/권근한 주재기자

 





▲ 성일종 국회의원

▲ 칠지도기념사업회 박병석 회장


▲ 서산시의회 윤영득 부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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