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복의 자는 자상, 호는 필운 동강 백사 청화진인이라 불렀다. 명종 11년 경주 이씨 고려조의 명상 이제현의 후손이며 참찬 이몽량의 아들로 한양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매우 짖궂은 아이로 골목대장 노릇을 하다가 어머니의 책망을 듣고 학문에 힘썼다. 당대의 명망가인 영의정 권철의 손녀 사위 즉 권율의 사위가 되었다.



선조 13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랐다.



슬하에 4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성남, 정남, 규남, 기남이고 딸은 한림교리 유인옥에게 출가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시에 도승지가 되어 왕을 모시고 천신만고 끝에 임진강을 건너 개성에 이르러 이조참판이 되고 오성군에 피봉되었으며 두 왕자를 호위하여 먼저 평양에 이르러 형조판서에 특진하였다.



조정 대신들은 왕에게 함흥으로 피난하기를 청했을 때 함흥은 명나라와 교통할 수 없으므로 영변으로 피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덕형과 더불어 명나라에 속히 구원병을 청하기를 주청하였다. 적세가 평양에 미치자 왕을 모시고 의주에 이르렀다.



명나라에서 들어온 황응양에게 조선과 일본이 협력하여 중국을 치려한다는 유언비어에 대한 의심을 풀게 하고 이여송이 인솔한 구원병 사만이 조선을 돕기 위해 들어오게 하는데 성공하였다.



임진왜란 중 다섯 번이나 병조판서의 중책을 맡아 군을 재정비하고 난의 수습에 노력하였다.






4. 백사공 사위와 목 벨 내기 장기를 두다